논문자격시험 합격 이후
생각치도 않게 논문자격시험에 합격한 이후 공부하기가 훨 수월해졌다. 지질나게 운이 없었던, 내가 모르는 곳만 골라서 터져나온 문제들 덕택에 두 과목 모두 나가리됐던 지난 가을과 반대로, 연구방법론에서는 내가 딱 일주일 전에 코드 짜 본 MLE와, 회사 다니면서 이런저런 차트와 로드맵 그리던 야매로 와꾸 짤 수 있던 Program Logic Model 짜는 게 문제로 나오질 않나. 결정타는 행정이론 전체 문제가 공-사 영역 구분에 대한 문제가 나온 것이었다. 석사논문 주제가 그거인 데다가 회사생활의 80%가 공공성과 효율성 줄타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뻥을 치고 살아온 덕택에 수월하게 썼다. 무튼 열흘 후 보스의 문자 - 축하. 술사 - 한 줄에 나는 그냥...
뭐랄까. 보스의 말마따나 "공식적 허들"을 넘고 나니 수업 준비와 평소 공부하는 방법 자체가 달라졌다. 코스웍 마지막 학기니만큼 수업 자체가 많지 않지만, 이제야 수업 전에 읽어가야 하는 레퍼런스를 거의 다 읽어간다. 그러자면 하루에 최소 두 편의 논문을 빡빡하게 읽고 정리해야 하는데, 요령이 붙은 탓도 있고, 여유가 생긴 탓에 궁금한 구절 더 찾아보기도 하고 레퍼런스 타고 또 타는 종이 위의 유람을 가끔 즐기기도 한다. 보스 말이 틀린 게 없다. 논자시 마치고 박사논문 쓰기 전까지가 가장 공부 많이 하고 책 많이 읽으며 생각 많이 할 때라는.
어제는 모종의 집구석 사정으로 학교에 안 가고 집구석에서 통계분석 알바와 수업준비를 했다. 글쎄, 집구석에서도 공부 안 되는 건 아닌데, 의지박약으로 인해 학교에서 하는 것 보다 확실히 효율이 떨어진다. 가장 큰 차이는 긴장.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동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걸 공부하고 있는지 듣는 것 자체가 큰 공부이자 자극이 된다. 아직도 뼛속까지 박혀있는 공돌이 근성 때문에, 테크니컬한 조언밖에 못 해주는게 아쉽다. 그렇지만 내가 무엇이 부족하고 뭘 더 해야 하는지 빨리 깨닫게 해 주는 건, 아무래도 비슷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다.
요즘 "직관", intuition에 대한 생각을 자주, 많이 한다. 무리한 일반화를 좀 하자면, 주류 사회과학 전반의 연구방법론은 몇 가지로 수렴된다. 계량경제학 모형, 구조방정식 모형이 대표적이고, 특정 분야에서만 사용하는 한정적인 방법론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 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떤 사람을 XX학자로 "한정"하여 불리우게 하나? 그건 특정 영역의 이론과 직관이라는 게 요즘 내 생각이다. 무언가 주장하고 입증하고 싶은 "이론"이 있고, 이를 현실의 관찰값을 통해 입증하는 것이 일반화 가능한 "연구방법론"의 문제라고 하면, 해당 특정 분야의 "이론"을 바탕으로, 시쳇말로 "판을 짜는"것은 어디까지나 그바닥에서 밑바닥부터 박박 굴러가며 얻은 "이론"이 있어야 가능한 거다. 그 "이론"을 어떻게 짜느냐는, 모방과 습득, 경험 등 지적 자산을 바탕으로 한 특정 분야의 "직관"이 있어야 가능한 거겠고. 그렇다면 "좋은 학자", 아니 "학자"의 판별 기준은 바로 "직관"에 있는 것 같다. 무슨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직관"의 문제다. "직관"은 어지간해서는 방법론, 관찰값이, 데이터가 주지 못한다. Data Driven Theory의 문제가 무엇인지, Data Science의 문제가 무엇인지, 왜 특정 분과학문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지난 학기, 필요에 의해 인지부조화 이론에 대해 빡세게 공부해야했다. 이 책 저 책을 뒤지는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아니, 가장 압도적이었던 책은 제목부터가 "Cognitive Dissonance - a pivotal theory in social science" APA에서 발간된 이 책은, 페스팅거 이후 50년간 심리학을 비롯해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적용되었던 인지부조화 이론의 기원과 비판, 그에 따른 적용에 대해 중요한 연구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쓴 원고 열댓 편을 묶었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하나의 개념에 대해, 다양하고 깊은 연구들을 책 한권으로 묶어내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러고나서 찾아보니 APA의 시리즈물 중 하나더라 이 책은. 심리학 나와바리의 개별 개념에 대해 책 한권을 통채로 할애하여 설명하는. 내가 심리학 전공자였다면, 아니, 하다못해 박사과정 입학할 때 생각과 같이 조직행태를 공부할 생각이었다면, 이 시리즈 전체를 구해서 밑줄 박박 치면서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야 생각이 많이 바뀌었으니...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아직도 어떤 의미에서, 또한 실질적으로 행정학의 중심으로 인정받고있는(적어도 대학 이상의 커리큘럼상에서) 조직이론, 특히 조직행태분야의 논문을 읽을 때마다 든 생각인데, "이 간단한 거 입증하려고 이 삽질을 해야 한단 말이야? 그것도 (대부분) 설문으로?" 아마도 내가 조직론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바래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