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人

저글링

mannerist 2014. 10. 27. 14:28

오랜만에 아내와 즐겁게 외출했다 돌아온 것 까지는 좋았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술을 마신 게 문제였다. 막걸리 + 맥주의 조합이라 머리나 속이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해진 출근시간에 30분 늦은 게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하필이면 이런 날, 아홉시 땡 치자마자 날아왔던 보스의 호출이었다. 이럴 때 내가 쓰는 말. "어머나ㅆㅂ"


무슨 이야기를 할 지 모를리가 있나. 지금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보스와의 프로젝트 세 개(교과서 집필, 사례연구 플랫폼 프로젝트, 소논문 하나. 이상 중요도순)겠지. 어떻게 맞아야 덜 아플까 최대한 고민하며 일단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카페로 직행한다. 행대 앞 학생들이 알바 뛰는 카페는 느려터졌다. 줄을 서더라도 프로들이 하는 경영대 카페가 낫다. 아메리카노 하나, 라떼 하나를 기다리고, 또 양 손에 하나씩 들고 이동하면서, 머릿속으로 보고 내용을 점검한다. 코웍하고있는 친구의 메일은 버스에서 대강 확인했고, 이건 사례중심으로 썼는데 포멧이 문제가 있어 내가 좀 필터치면 된다, 교과서는 추가해야할 부분이 데이터 머글링 쪽 좀 있는 거 같고, 특히 엑셀노가다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데이터 구조변환 부분을 좀 추가해야 한다, 그리고 수식 몇 개 빠진거. 보스의 오리지날 고과서에도 빠진 부분 몇 개. 진행중인 논문은. 아, 이거 나오면 진짜 할 말 없는데 이러면 죽여주십시오 하면서 모가지 길게 빼는 수 밖에. 


노크하기 전 복도에서 보스를 만났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예상범위 내의 질문들에서 잘 막아냈다. 그러나 문제. 임의의 자료를 표준화했을때, 이게 정규분포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왜 그런가? 절반만 맞췄다. 아, 이런 타이밍에 한동안 손 놓고 있던 수리통계학을 물어보시면 반칙이다. 별 수 있나. 약간의 갈굼은 감수해야지. 


사무실에 내려오니 벌써 열시다. 월요일의 일상적 일정대로 오전 내내 주임교수 두 분과 원장님께 보고드릴 업무보고를 짜고, 이번주 강사들에게 알림 메일을 쏜다. 그걸 대강 마무리하니 열한시 반. 이제 한 숨 돌리며 개인 메일 확인을 한다. 그제서야 어제 술 마신 여파가 아직 몸에 남아있음이 느껴졌다. 운동 세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신발주머니를 들고 나왔다. 


"이바닥 들어온 이상 평생 그러고 살아야 돼. 딱 한가지만 할 수 없어. 어딜 가나 기본적으로 연구용역 과제 두어 개와 논문 두세 개 정도랑, 각종 행정 잡무 계속 저글링을 하게 될 거야. 그거 잘 못하면 아무것도 못해. 그 이전에 아무데도 못 가." 아내에겐 미안한 말이겠지만 아마도 남은 일생동안 이러고 살겠지. 그와중에 여유는 여유대로 찾아야 할 거고. 지금같은 절박함은 덜하겠지만. 절박함이란 거. 여기에 기대어 신경 곤두세우고 사는 거, 일생의 일부니까 할 만 한 거다. 평생 이러고 어떻게 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