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字錄2014. 1. 7. 10:16

셜록 301, 302


한마디로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지난주 금요일 밤, 생각보다 논문이 잘 안 읽혀(학술영어논문OTL) 하루종일 우울했었는데 집에 돌아와 셜록 301 보면서 그 야밤에 허리가 끊어지고 방구석 뒤집힐 때 까지 웃어댔다. 옆지기가 조울증을 의심해서 두 번이나 방문을 열어볼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냉정히 말하자면 K의 의견대로 기대에 못 미친 엉성한 얼개였으나 시즌 1, 2의 여섯 편, 아홉 시간에 걸쳐 구성된 캐릭터의 역사 때문에 조금만 비틀어도 오만 잡상이 다 떠오르고 몇 개의 잡스러운 백그라운드 스토리가 떠올라 안 웃을 수가 없었다. "부녀자"들을 위한 서비스컷만으로도 301은 충분한 에피소드였다. 


반면 302는 에피소드 내 기복이 심하긴 했지만 초중반의 난잡한 스토리가 중반 지나면서 미친듯이 한 점에 집중되며 분산된 이야기 조각을 하나로 누벼내서 폭발시키는 전개가 압권이었다. 중반까지는 그간 구축해 둔 캐릭터 팔이로 먹고 살 것인가 하는 실망과 의구심이 떠올랐다. 그러나 난잡한 스토리 전개가 한 큐에 꿰어지며 절정을 향해 질주하는 구성 능력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만세를 외칠 수 밖에 없었다. 303을 봐야 판단이 들겠지만, 시즌을 통틀어 한 편 자체의 완결성으로는 가장 뛰어난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303에 기대를 더 해 본다. 301에서 다소 엉성했던 얼개와 떡밥이 한번에 여기에 끼워맞춰질수도 있겠구나 싶다. 


군말 조금 더. 시즌 1, 2, 3의 구성이 비슷하다. 어느 시즌이나 1편과 3편은 긴밀하게 "주적"과 연계되어있는 데 반해, 2편은 아예 따로 떼어놓아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독립적이다. 302가 독보적이었던 것은 102, 202와 달리 그간 구축해 둔 셜록과 왓슨,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를 폭발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훌륭한 거고. 




정도전


간만에 프라임 타임에 방송되는 정통 사극인지라 본방 사수를 고려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다소 실망스러운 구석이 있어 출퇴근시간 지하철 활용으로 전환했다. 먼저 조재현. 모르겠다. 진지한 배우는 맞는지 몰라도 연기를 잘 하는 배우는 아닌 듯 하다. 언제나 조재현을 보면 느끼는 건 파토스의 과잉이다. 어떤 배역을 맡던간에 눈에 힘 주고 목에 힘 들어간 부리부리한 캐릭터와, 빠른 발성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이것이 최악으로 맞아들어간 게 에쿠스의 다이사트 역이었다. 극 전체에서 알렌에 대비되는 이성과 냉정을 유지해야 할 다이사트가 속사포같은 속도로, 파토스를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알렌이 억누르는 광기에 대해 안도하면서도 안타까워하는 대사를 치니 그게 맞아들어갈리가 있나. 그 불편한 파토스의 과잉이 정도전에 그대로 드러난다. 


믿고 보는 유동근 이성계와 박영규 이인임, 최영 서인석, 이방원 안재모 이외에 다소 불안한 캐스팅도 몇 개 있다. 그 선두주자는 뭐니뭐니해도 정몽주와 하륜. 모르긴 몰라도 드라마 전체에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립각을 세울 두 캐릭터가 너무 약하다. 교과서적인 이미지와는 판이하게 달리, 우왕을 등에 업고 이성계를 궁지로 몰았던 무시무시한 인파이터 정몽주, 컴플렉스 덩어리면서도 뚝심과 능글능글함, 그리고 배후조종자로서의 야심을 품어 이방원의 편에 서고, 결국 뒤통수를 날려버리는 하륜, 두 사람의 캐릭터가 너무 둥글둥글하고 약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故김흥기 선생의 무시무시한 전범이 이들이에게는 없다는 거 정도일까. 


각설하고... 스토리 면에서 아쉬운 것. 이인임이 너무 평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것과 공민왕을 막판에 정신 차렸으나 간계에 암살당한 비운의 군주로 그린 것. 이건 역사적 사실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그대로 그리는 게 훨씬 더 나았을 텐데. 자신의 후궁들과 자제위들 합궁을 시킨 건 말년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공민왕의 뜻이었고, 암살 역시 후궁 중 하나가 임신을 하자 "쥐도새도모르게 자제위 녀석들 죽이고 내아들로 삼아야지" 했던 말이 새어나가자 자제위 애들이 즉흥적으로 암살했던 것이며, 이인임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권력의 배후조종자로 자리잡는다. 이 과정 자체가 드라마틱한데 좀 어설프게 "비운의 개혁군주 좌절"이라는, 먹힐만한 코드로 갔던 건 좀, 사실 많이 아쉽다. 다만 이렇게 원안을 짰다면 정도전이 초반부터 얼굴 디밀 여지가 적어지니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받아들여줄 만 하다, 라고 생각한다. 그저 초반부는 서인석 선생의 라스트 왕당파 최영 장군의 건투, 중반부는 유동근의 이성계 비긴즈, 후반부는 안재모의 다크 이방원 라이즈만 믿고 갈 뿐이다. 조재현은요? 내알바아님

Posted by mannerist
學人2013. 12. 29. 01:26

전 회사동료를 만나서 밥 한끼하고 얘기하던 중이었다. 녀석이 논문 골아퍼 죽겠다며 하는 소리 하나하나가 기막혔다. 정말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이 할 수 있는 무지가 모두 쏟아져 내렸다. 


"내 논문은 선행연구가 없어. 그래서 힘들어."

"이론은 레퍼런스 다 달아 놓으니까 별로 안 중요해. 요즘 다 그렇게 써."

"통계, 나 하나도 모르니까, 코딩 끝나면 어디에 맡길까, 요즘 그거 해 주는데도 많은데."


친구 사이에, 또 모가지 내놓고 공부할 녀석도 아닌지라, 좋은 게 좋은거다 하면서, 코딩 마치면 회귀모형 정도는 봐 주겠노라고 했다. 돌아오는길, 마음이 무거웠다. 사이버대학교 대학원의 날림 학위 장사가 이정도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론적 배경은 배끼는 것, "딱 들어맞는" 선행연구가 없으니 내 연구는 독창적인것, 통계는 맡기면 되는 블랙박스같은 것. 


공부가, 내공이, 실력이 필요한 게 아닌, 간판이, 학위가 필요한 사람들, 그리고 그걸 검증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체계가, 지금의 난장판을 만들었다. 비판하지 말자, 누구의 탓도 하지 말자. 그저 이 파국을, 주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데, 씁쓸히 웃으며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자.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3. 12. 9. 00:28

내가 생각하는 학자의 자질과 능력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왜?"를 어느 수준까지 밀고 올라갈 것인가? 어디서 "왜?"를 멈출 것인가? 


연구실의 석사 3학기 ㅇ과 1학기 ㅎ는 같은 수업을 듣는다는 이유로 같은 조가 되어 발표를 한다. 꽤나 샤프하고 집요한데다 만만찮은 직장경력까지 있는 ㅇ는 한 번 시작하면 답이 나올 때 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있다. 반면 ㅎ는 삼십대 초반까지 고시생활을 하다 안 되어 공부로 방향전환을 한 녀석이다. 지독하게 공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빈말로라도 "대충 공부했다"는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낄낄대며 했던 녀석이다. 당연히 둘의 싱크로가 좋을 리가 없다. 모르면 모른갑다 배 째는 ㅎ와, 답이 안나오면 밤을 새서 답을 만들어내는 ㅇ가 죽이 제대로 맞을리가 없잖나. 옆에서 보기에도 아슬아슬했다. 정작 더 문제는, ㅎ는 그것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 


ㅅ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미친듯이 달려야 할 때 달리지 않았다는 것. 


이 죄는 나도 마찬가지다.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