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SS교재 만들기는 정말 영혼없이 끝내자면 두세 시간에 싹 끝내버릴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영혼없다는 말은, 내부 논리나 수식 이런거 개무시하고 어떻게 이 툴을 다룰 지를 서술하고, 결과 해석하는 법을 달면 게임 끝이라는 말 되겠다. 그런데 이걸 제대로 잡아 들어가자면 한량없다. 회귀진단에서 영향점을 파악하는 논리를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추정치에 대한 신뢰구간을 구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자면 이넘의 분산이 가진 성질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여기에 플러스 알파, 보스가 써 둔 교재와의 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하나하나, 라인 바이 라인으로 잡아가다보면 손 댈 구석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러다보면 별것도 아닌 걸로 개삽질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어제의 개삽질은 그런 거다. 회귀모형에 대한 영향점을 변수별로 그리는 DFBEATS를 잡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동일한 모형으로 굴렸는데 보스의 그림과 내 그림이 다른 거다. 두시간을 이걸 가지고 씨름하다 알아낸 결과는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관측치의 정렬 순서가 달랐다. 허탈함이 밀려왔다.
취직 후 인사차 사무실에 들른 S 덕택에, 연구실 사람 모두와 저녁을 함께 했다. 첫 직장생활을 하는 S를 앞에 두고, 내가 옛 직장에서 벌인 여러가지 뻘짓을 이야기하며 낄낄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보스의 차 안에서 내가 한 삽질을 이야기하며 자학했다. 보스의 평소 스타일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그런 삽질을 많이 해 봐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문제는 그 다음 이야기가 내게 좀 걸린다는 것.
너랑 그 누구야, K가 한 걸 잘 비교해보면, 너보다 K가 훨씬 자세하고 꼼꼼하게 잘 봐. 왜그런지 아니? 너가 좀 많이 해 봐서 안다고, 익숙한 거 그냥 그려려니 하고 넘어가는 걸, 처음 보는 사람은 하나하나 다 짚고 넘어가기 때문이야.
솔직히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까놓고 말해, 오만 잡일 여기저기 다 땜빵 메워가느라 내 공부시간도 쪼개는 판국에, 다들 지 공부 한다고 손에 놓다시피한 원고 교정 눈빠지게 봐서 얻은 평가가 고작 저건가. 그 판국에 쓰는 원고도 다 집어치우고 집에 가서 맥주나 한 잔 하고 쳐 자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나. 보스에게, 그리고 연구실 동료들에게, 월요일까지 다 끝낼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쳤던 거 쪽팔려서라도 마무리해야지. 글자 그대로 자리에 앉아 썅소리를 물어가며 간신히 간신히 원고를 닫았다. 하루 동안 그림 캡쳐 오십여개와 만 이천자의 원고로 마무리했다. 아마 내가 삽질하다가 썼다 지운 걸 생각하면 그 세 배쯤 될 거다.
돌아오는길에 곰곰히 생각해봤다. 내가 정말 원고 교정을 잘못 본 건가. 듬성듬성 본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이번에 SPSS교재를 만들면서도 절감한 거니까. 그러다 든 생각. 보스는 내가 교정을 못 봤다고 평가를 내린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말했던 게 아닐까. K가 나보다 더 꼼꼼하게 본다는 게 그런 게 아닐까. 이미 몇 사이클을 돌아버린 나는, 제 아무리 꼼꼼하게, 초심자의 눈으로 보려 노력한다 해도 볼 수 없는, 아예 무지 상태의 학생이 될 수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농담삼아 연구실 동료들에게 내가 쓴 글 다시 읽을때는, 내 안의 또다른 나를 끄집어내거나 내 밖의 제 3의 인격을 소환해서 보는 습관을 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만약 이게 완벽하게 된다면 그게 사람새낀가. 이중인격자겠지.
그제서야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 나잇대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게 있다면, 그건 세상일에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될 일과 안 될 일이 따로 나누어져있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기분 더러워도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손 닿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 오늘은 기승전 우정사,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당연히 노희경 드라마).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와 최선밖에 없다는 이야기.
p. s. 현실 데이터를 가지고 보는 omitted variable bias를 왜 short regression과 long regression의 일반적 설명방법을 준용해서 설명할 때 삑사리가 나는지에 대해 엑셀로 직접 행렬 계산을 해 보다가 한달만에 깨달았다. 현실의 데이터에서 공분산 행렬이 CR모델의 가정을 완벽히 만족할리가 없잖아! 그걸 쌩노가다 끝에 제대로 아는 데 한 달이 걸리다니!! 난 아직 멀었어, 망했어,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