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人2014. 6. 30. 13:51

잠시 후, 학회논문 발표가 있다. 이번에 발표할 ppt는 토르소 내지는 크로키 정도다. 핵심적인 연구문제와 방법론, 결과와 함의만을 ppt 20장 정도에 녹여냈다. 반년간 드문드문 진행된 보스와의 이번 코웍은 꽤 괜찮았다. "지난 20여년간 아시아 행정학 연구 주제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는 막연한 질문으로 이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보스가 만든 80% 데이터에 내가 20%정도를 업데이트했다. 막연했던 연구문제를 1)아시아와 서양 주류와의 비교 2)아시아 내부의 동질성 3)아시아 지역 연구와의 비교라는 세 꼭지로 잡아낸 것은 나. 이걸 formal 한 용어로 바꾸어서 정리한 건 보스. 기존의 행정학 연구 경향을 분석한 선행연구의 틀을 따서 비교하는 연구방법을 택한 건 나. 그 방법이 난점과 해결책 몇 개는 보스의 역할. 1차적인 분석 결과와 근거를 내가 내면 보스는 그 중의 논리적 점프와 빈 구석을 채웠다. 이런 식으로 두어 번 면담하고 메일 몇 번 오고가니 어쨌든 완성.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행정학의 여러 분야와 그 분류 체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던 점이다. 왜 하필 보스가 이 프로젝트를 나랑 진행했는지 알겠더라. 최고의 연구 결과물이 2x2 matrix이듯, 결국 학문은 분류 없이 설 수 없다. 최근 20년의 추세에 대해 감을 잡게 된 것도 소득이고. 아마 보스가 내년에 안식년 떠나면 비슷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할 것 같은데, 내 주된 관심사는 아니어도 보스와 같이 공부하는 이상 어느 정도 발은 담가야 할 것 같다. 


아, 또다른 행운을 이야기하는 걸 까먹을 뻔 했군. 보스의 교재 집필과 맞물려 돌아간 이번 프로젝트에 주로 교차분석 방법을 뼈빠지게 써먹었는데, 보스의 책에서 매우 강조된 부분이 바로 그것. 기존의 통계학 교재가 교차분석에 대해 꽤 문제가 많다고 보는 게 보스의 생각이었다. 심슨의 역설에 대해 제 3의 변수 통제가 중요하다 강조만 하고, 정작 통제 방법은 제시되어있지 않거나, 그냥 카이스퀘어 정도 이야기하고 넘어가고. 보스의 책은 다양한 교차분석 방법을 제시해서 이쪽도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음을 강조한 게 장점. 그러고보니 생각나는데, 발표 끝났으니 이제 열심히 교정 봐야겠구만. 아, 정말 내 공부는 언제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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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14. 6. 29. 14:10

연구실의 K가 대형사고를 쳤다. 수습할 방법이 없다는 게 첫번째 문제다. 더 큰 문제는, 보스가 이를 수습하려고 시도하는게 우리는 물론이고 보스에게까지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일이라는거다. 일이 그렇게 된 이상, 나는 K에게 지랄을 할 수 없었다. 수습가능한 거라면 지랄 한 번 세게 하고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대로 하고 있는지 족치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수습할 수 없는 일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랴. 가능한 한 "이런 이야기 하는 게 정말 안타깝고 미안하지만..." 이란 말머리를 붙여가며, 녀석의 눈앞에 닥친 현실이라는 괴물의 형체를 대강이나마 이야기 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고 K의 대형사고에 원인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녀석은 연구실 출입구에 가장 가까운 자리이자, 내 서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다. 그런지라 오며가며 녀석의 책상이 눈에 가끔 들어온다. K는 다짐이나 할 일을 책상 앞에 포스트잇이나 메모지를 써서 붙여놓는 습관이 있다. 어느순간 내가 보고 뜨악한 게 하나 있었다. "행정일은 최대한 기계적으로, 영혼없이." 나는 그때 K가 오만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기계적으로, 영혼없이" 처리하기에, K의 행정사무처리 능력은 너무도 형편없다(그와 반대로, 학문적으로는 보스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학생이 K이다). 그런데 행정사무라는 일의 성격상, 하는 사람이 빵꾸내면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에게 적잖은 민폐를 끼치는 일이다. 그렇게 빵꾸 몇 번 나면 평판도 덩달아 떨어지게 된다. 역시나, 심심치 않게 뚫린 빵꾸를 동료들이 꽤나 많이 메꾸어주었다. 말로는 고맙다고 하지만 그런 일이 빈번해지니 지나면 지날수록 립서비스 정도로만 느끼게 되는 측면도 있고, 더 큰 문제는, "얘는 그거 안 되는 얘"로 찍혀버리기 딱 좋다는 거. 


더 큰 문제가 있다. 세상에는 K의 말마따나 "최대한 기계적으로, 영혼없이"하는 일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우리는 '사무직'또는 '행정직'이라고 부른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메뉴얼화되어있는 일은 정말 '기계적으로' 쳐 나가겠지만 그것만으로 커버할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은 수시로 터진다. 바로 그들이 적잖은 연봉을 받는 이유는 그런 "예외적"인 경우를 많은 사람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유연함 때문이다. 그런 일을 "기계적으로 영혼없이"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무시무시한 능력자이다. 


지금의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 K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 지난 학기와 이번 일을 거치면서, "자기 일 말고는 주변에서 뭔 일이 터지는 쌩까서 결과적으로 민폐를 끼치면서, 나중에야 말로 대강 무마하려는 성향의" 캐릭터였다는 걸 내가 너무 늦게 알아서 이미 마음속으로 아웃시킨 캐릭터긴 했지만, 그래도 한 때 연구실에서 가장 믿을만한 동료가 될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한 적이 있던 건 사실이니까.

Posted by mannerist
學人2014. 6. 27. 04:01

오늘부터 Ph. D. Candidate이다. =)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