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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06 그랜드피아노를 둔 집
打字錄2012. 4. 6. 19:08

A와 본 건축학개론에서 유난스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랜드피아노를 들일 자리를 만들기 위해 설계를 다시 하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영화 한 켠에 피아노가 뭍어나오자, 난 자연스레 3년 전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결혼할 것이라 생각해왔던 C와 헤어지고 나서 별의 별 망상을 다 하고 살았다. 그때가 내 회사 생활의 절정기기도 했고. 본의 아니게 내 사수가 팀장에게 밉보여 한직으로 밀려나면서, 내 일에 대해서 그 누구도 터치못하던 시절, 무능의 극치를 달리던 팀장과 허구헌날 치고 받으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책과 피아노로 풀었다. 그리고 그당시만해도 환갑까지 조직에 몸 담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라 원주에 갈 거라 생각했다. 이왕 노총각 된 거, 그리고 할 수 있는 연애질은 다 해봤다고 착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원주 가서 마당 있는 집을 짓고, 그 안에 그랜드피아노를 들여다놓는 상상을 하곤 했다. 심심할때마다 중고 베이비 그랜드를 검색하는게 크나큰 소일거리였다. 4-5백 정도 하는 베이비그랜드를 삼십대 중반에 원주에서 독립하면서 방에 들여놓고, 퇴근하면 지칠때까지 건반을 짚다 잠드는 꿈을  꾸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에 나는 만 7년으로 내 첫 직장생활을 마감했다. 2년 전, 옆집이 없는 아파트 1층 맨 끝집으로 이사오며, 내가 애정을 담아 "돼지"라고 부르는 1988년산 131cm짜리 영창 업라이트 피아노를 들였다. 미래의 그랜드보다 현재의 업라이트를, 해가 떴을 때 만이라도 마음껏 연주할 수 있는 게 내겐 필요하니까. 하지만 지금도 그랜드 피아노를 다루는 꿈을 버린 것은 아니다.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서울이 아닌 공간에 자리를 잡고, 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할 지라도 그랜드 피아노를 방에 넣을 꿈을 지금도 꾼다. 할랑한 삶을 지향하는 내 망상의 상징같은 녀석이다. 베이비 그랜드가, 내겐 그렇다.


하루종일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다, 해질녘에 건반 앞에 앉아 한 시간 정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의 마지막 악장을 계속해서 연습했다. 태평양을 바라볼 수 있는 집에 놓여진, 카와이 그랜드 피아노가, 계속해서 눈 앞에 어른거린다.


하긴,그 전에, 돼지한테 뽑아낼수 있는 모든 소리를 뽑아낼수 있어야할 텐데. =)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