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字錄'에 해당되는 글 65건

  1. 2015.07.01 글자 그대로 잡설
  2. 2015.01.28 지뢰밭
  3. 2015.01.26 전주 여행
  4. 2014.12.30 2014년 결산
  5. 2014.12.25 올해의 마지막 '일'
  6. 2014.10.11 토요일 오후
  7. 2014.09.17 극혐
  8. 2014.08.31 책보다 아 짜증
  9. 2014.08.28 타인의 시선
  10. 2014.08.23 서울대
打字錄2015. 7. 1. 17:47

삼월 초에 내가 끄적거린 이야기를 다시 본다. 그시절에 내가 얼마나 희망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는가를 읽었다. 올해의 절반이 지나간 지금 보니, 쓴웃음만 나온다. 지난 반년동안 여기에 차마 적을 수 없는 아사리판을 뚫고 나왔다는 것만 기록해 둔다. 이건 뭐, 예전 직장에서 희대의 병신이었던 마지막 이사장과 정치인 낙하산 출신 팀장과 일하던 것과 비견할 만 했다. 이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건 내가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끝날 수 없다. 하지만 난 공부해야 하는 만큼 돈도 벌어야 한다. 


서베이 방법론 논문... 처음에 시작할 땐 간단한 Data Driven 으로 생각했건만 이론적 틀을 짜면 짤 수록 미궁에 빠진다. 인지심리학 베이스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응답시간이 왜 응답오차와 관련이 있고, 이를 통제해야하는가를 타당하게 정당화하기가 너무 어렵다. 응답시간이 개인의 특성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주변 환경이나 설문 여건에 따라 satisficing 을 작동시키는가를 볼 수 있는 index가 된다는 관점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번째. 그럼 응답시간이 긴 것은, system2를 작동시킨다는 이야기가 될 텐데, 그렇다면 응답시간 긴 건 문제가 없나? 인지과학적으로 별 문제가 없는 행태인가? 아니면 지나치게 응답시간이 길어진 것은 응답하다 딴짓을 한 거니까 중간에 흐름이 끊겨(이걸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도 너무너무 힘들겠지만)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건가? 두번째, 응답시간만 가지고 satisficing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예상가는한 반론들이 내가 봐도 너무너무 많다. 이런 저런 예상가는한 반론과 논리적 점프, 함정을 피해 가려고 하니 한 줄을 쓰기도 힘들다. 어쨌든 뚫어내야 한다. 


박사논문. K교수님이 정말 어려운 길을 간다고 했다. 쓰기도 어렵고 바이하기도 어려운 이야기라고 하셨다. 아예 딱 잘라서 쓰지 말라고 하는 것 보단 낫다. 그랬다면 그렇게 말씀하셨을 분이니까. 문제는 이바닥에서 만렙 찍은 보스를 내가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는가다. 그런데 일과 방법론 논문에 치이고, 집구석 비지니스에 시달리다 보면, 부담감은 부담감대로 느끼고 시간은 쪼갤 수가 없다. 


이판국에 설탕액정 손전화는 또 나가고... 안팔리는 스맛폰은 다 이유가 있다.야매수리 액정값 11만원을 또 물을 수 없어 수리는 포기. 다만, 서베이 논문 털어내고 운동해서 90kg이하로 몸무게 다시 떨어뜨리면 그때 지르는 걸로 욕망을 누른다. 버티는 게 남는거다. 기승전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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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15. 1. 28. 02:02

폭탄도 이정도 터지면 반칙이지. 한겨울에 빤쓰만 입은 채 지뢰밭 한가운데 떨어진 판국이다. 교재 교정, 연구용역1, 연구용역2, 과정 업무, 부가적으로 떨어진 S선배 일, 연구실 세미나, 내 공부, 여기다가 진짜 대박이 하나 터졌다. 아무래도 다른 놈이 터뜨린 폭탄을 내가 안은 것 같은데 이를 어쩐다. 어떻게든지 수습해야지. 어디 가나 이 팔자는 안 변한다. 걸레 빨아 행주 만들기. 아마 평생 이럴 거 같다.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5. 1. 26. 00:13

A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1박 2일 일정으로 전주에 다녀왔다. 짧게 몇 자 남김다. 


금요일 저녁까지 일을 해야 했다. 대충 머리를 굴려보니 아무리 빨리 끝나봤자 열시였다. 그리고 토요일 오전부터 오후 세시까지는 석사 학생들 논문을 봐 줘야 했다.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짰다. 금요일 아침에 모든 짐을 꾸려서 금요일에 학교에서 자고, 토요일 세시까지 버티다가 바로 전주에 가는 방법이 제일 낫지 싶었다. 최소한의 짐을 꾸렸다. 


금요일의 일은 다행히 아홉시 반쯤 끝났다. 맥이 탁 풀려왔다. 밖에 나가 캔맥주를 사 왔다. 과정 업무상 구입했다가 남은 도시락의 반찬을 안주삼아 두 캔 마셨다. 조금 마시고 잠이 들었다. 달게 자고 일어나, 식어버린 도시락의 국과 밥을 전자렌지에 데워 마져 먹었다. 


계량분석을 도와주는 TA시간에, 석사 학생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잠시 짜증을 내다 가방을 꾸려 남부터미널로 향했다. 


다른 도시를 갈 때, KTX와 고속버스의 시간차를 비교한다. 두 시간 이상의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왠만하면 버스를 탄다. 표삯이 가장 큰 이유이고, 그 다음은 대전, 대구, 부산이 아닌 이상 대부분 KTX역이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도심 접근성이 떨어지는게 두 번째 이유다. 경주의 예를 들어보자. 서울에서 경주까지 KTX는 2시간 반이면 간다. 하지만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신경주역에서 좌석버스 타고 들어가려면 삼십분을 더 잡아야 하고 아차 재수없어서 버스를 놓치게 되면 거기서 삼십분이 더 녹아버린다. 울산의 경우도 비슷하다. 하지만 시외버스를 타면 차 안막히는 밤에는 네 시간, 보통 네시간 반이면 도심에 있는 터미널까지 떨어진다. 이러면 표 값 차이는 두 배 넘게 나지만 시간차는 한시간에서 한시간 반 밖에 나지 않는다. 나의 시간가치는 그렇게까지 비싸지 않다. 좌우간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면 대안이 없는 한 가급적 강남터미널을 피한다. 진주같은 예외도 있지만 동서울/남부터미널의 시외버스보다 같은 동네를 비슷한 버스로 가면서도 가격이 비싼 이유가 첫째고, 더 큰 이유는 반포까지 들어오면서 소모되는 시간이 꽤 크다는 점이 둘째다. 남부터미널의 경우 서초 IC에서 바로 나와서 터미널로 들어가니 목적지 다 와서 차가 막혀 고생하는 건 덜하다. 


세시 차를 타기엔 시간이 빠닥빠닥한데 지하철을 연달아 두 대나 놓쳤다. 6분전에 간신히 도착해서 남부터미널 매표소에 승차다이빙 하듯 뛰어갔는데 아뿔싸, 3시표는 다 팔린지 오래다. 3시 30분 표도 창가는 다 나가고 1/3밖에 안 남았다. 화장실 다녀와서 확인하니 매진이란다. 세시 반 표를 빨리 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해 넘어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해질녘 게으름피우며 풍남문을 향해 산책할 생각은 접어야했다.


생각보다 차가 막혔다. 두시간 반이면 끊을 거리를 세시간을 썼다. 전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서 이 방향이겠거니 하고 걷기 시작했다. 2007년 평가팀의 첫 출장이 생각났다. 광주에서 전주로 이동했었지. 다음날 전주방송국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모님 댁으로 향했던. 내가 딸기를 사갔을거다. 저녁을 먹고 조카들과 또래오래 순살치킨을 먹으면서, 꽤 웃었던 거 같다. 


A는 결혼식에 오는 하객들을 위해 한옥마을의 민박 하나를 통채로 빌렸다. 아내와 같이 왔어야 했다. 하지만 A에 관한 일은, 아내가 걸려 있을 때 이상하게 타이밍이 안 맞았다. 내가 결혼했을 때 녀석은 미국에 잠깐 건너가 있었고, 이번 녀석 결혼식은 아내의 동남아 한달 답사가 걸려 있었다. 그 덕에, 난 이렇게 여유부리면서 전주의 밤길을 걷고 있는 거지만. 


도시의 익명성과 인프라를 누리면서 혼잡함을 최소화할 수 있는 크기가 전주 정도라고 생각한다. 50만이 조금 넘는 인구와 택시를 타고 끝에서 끝까지 30분이면 갈 수 있는 크기 말이다. 


대충 이 방향이겠거니 잡고 걷다보니 영화의 거리가 나왔다. 아무 생각없이 골목을 거닐다가, 3년전 아내와 함께 왔던 '빈센트 반 고흐'가 눈에 들어온다. 3년 전에는 꽤 어렵게 찾았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 간판이 눈에 들어오니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다. 그때 시간이 여섯시 사십분쯤 되었나. 가서 삼십분만 커피 한 잔 하자 마음먹고 내려왔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서가를 둘러보았다. 알아서 목소리를 낮추어 대화하고,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 다들 이 곳의 공기에 익숙해보였다. 무슨 책을 훑어야 하나 둘러보다, 강준만의 '나의 정치학 사전'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 곳은 무엇보다 강준만의 도시였지. 그의 책을 폈다. 행정학을, 사회과학을 공부하는게 지금 내 일인지라, 학적 개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경로의존성, 공공선택론 같은 거 말이다. 약간 실망한 지점이 있다. 지금 여기의 사회학을 강준만은 말하고 있었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나의"정치학 사전이었다. '경로의존성'은 결국 호남 차별에 대한 이야기였고, 공공선택론에 대한 이야기를 얄팍했으며, 평론가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명확한 정의 없이 여러 이로 인한 여러 효과만을 나열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 하나하나가 2000년대 중반의 한국 현실과 잘 엃혀있다는 점 만은 부인하기 힘들다. 


한형곤 선생의 단테 신곡 연구 서문을 꼼꼼히 읽었다. 단테 신곡을 통해서 보편과 특수에 대한 자신의 논변을 펼치는 글로 판단된다. 도서정가제 광풍 끝자락에 잘 잡은 듯 하다. 


한옥마을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었다. 옆방의 두 선배에게 인사를 했다. 둘 다 10년만에 인사를 하는지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침먹고 아무것도 안 먹은지라 솜리치킨 반반과 맥주 몇 캔을 사서 방안에서 1FM을 틀어두고 한형곤 선생의 책을 읽으며 먹고 마셨다. 열시쯤 A가 왔다.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롤 보고 눈빛이 흔들리는 녀석에게 캔을 따서 내밀었다. "안그래도 땡겼는데" 두 모금으로 500ml캔 절반을, 녀석은 비워냈다. 사람들이 많이 내려와 민박 한 곳을 더 빌렸다는 녀석을 보냈다. 문을 열자 녀석의 옆지기가 웃으며 인사한다. 런닝 차림이라 멀리 나가지 못했다. 나의 무례를 사과하고, 내일 인사드리겠다 했다. 


칫솔과 면도기를 사러 산책을 나갔다. 몇 바퀴를 돌다가, 아내와 통화했다. 해외전화 한도를 다 쓴 아내에게 전화기를 빌려준 J에게 감사 또 감사. 


아침 일찍 일어났다. 식장은 전주박물관 바로 앞이었다. 이른 아침 한옥마을을 한 바퀴 돌고 정류장으로 갔다. 노선을 검색해 보았다. 노선은 거기서 거기인데 번호는 제각각이고 배차간격이 긴, 전형적인 불편한 지방 소도시 버스노선이었다. 심지어,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노선정보도 맞지 않았다. 버스 차창밖을 구경하면서 지도에 눈을 떼지 않기를 잘 했다. 한적한 전주 외곽의 길, 그러니깐 정읍 가는 길을 조금 걸어, 전주박물관에 도착했다. 


아내와 최북의 그림, 문인화 여러 점, 그리고 도자기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오늘의 특별전시는 동검 24자루였다. 한 방에 출토된 24자루의 청동검, 어떤 청동검은 주조흔이, 다른 것은 사용흔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모양과 다른 동네의 청동검을 둘러보며 머릿속에 담았다. 최북의 그림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기억에 가장 남는 유물은, 어느 불상의 손목이었다. 아주 뚜렷하게, 생명선이 검지와 중지 사이부터 팔뚝까지 이어져 있었다. 


ROTC출신인 A는 몇 차례의 굴욕을 견뎌내며 결혼식을 마쳤다. 녀석이 열심히 부른 축가를, 나는 또렷하게 녹음했다. 악취미 맞다. 


아침부터 고민했던 게 있다. 이모님댁 들려서 인사를 하고 갈 것인가. 솔직히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집을 비운것도 2박 3일째,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청소하고 책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전주는, 내 국민학교 시절 방학의 한적함을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는 도시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온전히 이모님과 터울이 심하게 났음에도 나를 잘 돌봐 준 형, 누나들 덕분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든 생각이 있다. 40대 초반의 막내형은 얼마 전 폐암 수술을 받았고, 80을 바라보는 이모와 이모부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겠나. 열 번 보면 정말 다행일거다. 시내 가는 버스를 타서, 내 옛날 방학의 한적함으로 기억되는 동네, 인후동으로 향했다.  


오길 잘 했다. 지난달 서울에서 폐암 수술을 한 M형은, 어제 너무 양념이 단 떡갈비를 먹고 안 소화가 잘 안된다고 누워있었다. 형수가 커피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차려주셨고, 이모와 S누나는 옛날 사진을 한 상자 꺼내 정리하고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카카오톡에 올리며 서로 웃었다. 웃고 떠들다 한시간이 훌쩍 가 버렸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고3이 된 S누나의 아들이자 나의 조카, 가람이와 S누나가 만담을 하며 서로를 갈궈대며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옷차림의 매형은 담에는 귀띔 좀 하고 오라 웃으며 따뜻하게 타박하셨다. 고속버스가 아닌 시외버스를 선호하는 나를 신기한 듯 S누나는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도 고속이 빠르지 않니? 


아내와 전주에 가야겠다. 날 풀리면. 소바도, 모주도, 못 먹고 왔다.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4. 12. 30. 23:27

지난 글에 이어서 바로 올해 결산을 쓰지 못했다. 하기 싫은 일 끝내고 하고 싶은 일, 정확히는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을 바로 이어서 하지 못할 만큼 나이가 들어버렸다. 나이로 퉁치는게 너무 서글프지 않게, 체력과 정신력이 방전되었다 정도로 고쳐 읽기로 한다. 좌우간, 올해 마지막 연구실 동지들 모임을 마치고, 보스에게 보내는 올해의 마지막 메일(아마도, 제발)을 쳐낸 다음에, 이제야 몇 자 적는다. 이것도 아내가 귀가하기 전까지의 이야기가 되겠지. 


죽자고 일했고, 이갈면서 공부했다. 가시적인 성과는 미미하다. 이정도로 요약되겠다. 


먼저. 보스의 책이 나왔다. 그리고 보스와 나의 책이 곧 나온다. 현재 2교 보는 중이고. 짧게 쓰면 이렇게 간단한 말이다. 저작권. authorship에 포함할 수는 없지만 시간과 집중력을 써야만 하는 일이 저술 작업에 꽤 크게 들어간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작권에 포함되는 일 보다 더한 박람강기와 집중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시쳇말로 빛 안 나는 일이다. 모두가 배 째고 데드라인 넘길 때, 내 일 버려가면서, 그만큼 속 태워가면서 했다. 결국 그 와중에서 authorship을 얻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를 위한 공부를 할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고, 나도 배 째자면 충분히 배를 쨀 수 있는 일을 - 만약 그랬다면 보스의 성향상, 혀 한번 짧게 차고 당신이 했을 것이다 - 이런 씨발 내지는 내 인생에서 반나절 지우자, 하루 지우자, 삼일만 지우자, 하면서 꾸역꾸역 밀어나갔다. 그 와중에서 실수한 거에 대해 상상 이상의 욕을 먹기도 했고 혼나기도 했다. 그 기분, 알기 어려울거다. 내가 절실하게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 해서 한 일이, 내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잘못되어, 안 먹어도 되는 욕을 먹게 되는 그 상황. 올해처럼 그런 상황에 많이 놓였던 적은 없었다. 나몰라라 하는 연구실 동료들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꾹꾹 눌렀던 적도 없다. "선배는 능력 있으시니까..." 이 말처럼 날 짜증스럽게 하는 말도 없었다. 버티는 게 능력이라고도 하지만, 난 별로 즐거운 적이 없었다. 후회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속태워가면서 보냈던 이 시간들이, 나중에 어딘가 내게 도움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가장 잘한 일은. Goldberger의 A course to the econometrics를 완독한 것. 그리고 모자란 점 많지만 스터디를 만들어 여름방학 내내 굴렸던 것. 전보다는 이런저런 방법론이 많이 편해졌다. 어디까지나 저 책이 "개론서"에 지나지 않은 만큼, 실증연구자의 길을 택한 업보로 죽자고 앞으로 더 파야 할 거다. 적어도, 무슨 방법론을 접하든 "쫄"일은 거의 없어진 듯 하다. 


가장 뿌듯한 일은. 3년간의 갈굼을 버티고 버텨서, R사용을 보스에게 인정받은것. SAS나 제대로 하라는 핀잔을 받으며 시작한 나름의 독립운동이었다. 보스의 책 나온 후 보름동안 SAS코드를 R로 모두 바꿔서 보내드린 일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가장 큰 고비는, 옆방의 P가 읽던 JPPAM의 방법론 시뮬레이션 논문 재현이었고. 


마눌이 와서 오늘은 이만.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4. 12. 25. 15:04

아 진짜 하기 싫다. 2014년의 마지막 '일'을, 오늘도 꾸역꾸역 할 수 밖에 없다. 보스에게 이번주 초까지 보여준다고 해 놓고, 막상 잡으니 양이 만만치 않은데다 다른 일까지 겹쳐 도저히 안되겠더라. 수요일 오전에 목숨만 살려주셈. 전화로 허락 받아 간신히 데드라인을 늦췄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중에 다 쫑내고, 자기 전에 올한해동안 한 일을 느긋하게 끄적이며, 사실상의 2014년을 마무리짓겠다.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4. 10. 11. 15:25

최근 지지부진해진SPSS 책 작업. 보스가 연구실의 노인정 3인방을 모아놓고 선언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authorship을 줄 수 있는 건 매너놈뿐이다. 당연한 말을 들으면서 조금은 안도하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지난주 토요일에 한시간 넘게 보스와 t-test의 해석을 놓고 진빠지게 한 시간 치고받은 기억 때문인건가. 하여튼 보스가 데드라인으로 잡은 10월은 얼마 남지 않았고 원고는 지지부진하다. 보스가 초고를 주면 최대한 빠르게 처리할 뿐이다. 


죽인 프로젝트 살리기 진짜 힘들다. 논문의 '문장'이 잘 안 나온다. 이럴때는 의무적으로 강제집중을 할당해서 운영할 수 밖에 없다.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이 단어로, 문장으로, 문단으로 구체화되기 전에는 글자 그대로 뻘생각일 뿐이다. 타인과 커뮤티케이션이 가능한 형태로 구성되기 전에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망상에 다름 아니다. 


금전적으로 넉넉해진만큼, 절박함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모르겠다. 두 번째 월급날을 앞두고, 무서운 생각이 든다. 논문을 쓰는대로 인센티브가 나오는 BK장학생은 아니다. 그렇다고 논문 안 쓸건가. 그게 내 커리어고 밥줄인데. 무조건 꾸역꾸역 쓰는 수 밖에 없다. 좀 다른 생각으로, 인센티브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야 한다. 이를테면, 내가 별로 쓰고싶지 않은 상황에서 써야만 하는 논문은 이게 마지막이다 이런 거라도. 


연구실 후배들은 멀리 하는 반면에, 같이 일하게 된 후배와는 가까워지고 내가 쓰는 거의 모든 테크닉을 전수하고 있다. 이거 대체 뭔가. 보스에게도 푸념하듯 말했다. "그러게말이다." 보스도 씁쓸히 웃었다.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4. 9. 17. 13:13

그러고보니 그 이야기를 빼먹었군. 도무지 보스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저께 일로 생각이 좀 달라졌다. 딱 봐도 "학위"가 목적인 학생을, 그것도 무리까지 하면서 받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저희 쪽은 딱 3년에 학위 마치고 나가요"란 주옥같은(발음주의) 워딩을 치지 않나, 논문의 이론적 배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별 거 아닌걸로 치부하질 않나, 보스와 이야기 주고받는 걸 보면, 대강 해치우고 빨리 나가겠다는게 눈에 보일 때마다 속쓰렸는데(제안심사때 연구실 애들 굴려먹은것은 논외로 치자), 졸업논문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 여파를 조금 뒤집어쓰긴 했는데 그건 뭐 보스와 함께 논문쓰는 입장에서는 당연한거고. 좌우간 앞으로 어떻게 될 진 모르겠으나 - 보스를 지도교수로 모시기 위해 학칙까지 바꿨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캐릭터 - 일단은 안심.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4. 8. 31. 10:50

진심 능력이 안되거나 일을 대강 할 거면 원래 한다고 한 사람에게 넘기라고. 자존심만 살아서 지가 하겠다고 했으면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최대한 손 덜 가게 해야지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을 이지경까지 해 놓으면 어쩌라는거야. 썅. 정말 욕나온다. 이걸 대체 언제 다시 고치냔말야.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4. 8. 28. 01:33

고등학교때 일이다.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동명이인을 지닌 탓에, 이름을 둘러싼 평지풍파가 많았다. 그걸 또 투덜대던 어느 날이었다. 옆자리의 녀석 - 그자식 별명은 고모스였다. 성이 고씨, 이유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맘모스를 붙여 고모스 - 이 말했다. 넌 니가 니 이름이 ㄱㄷㅈ이 아니었다면 안 튀었을거라 생각하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건이 결정적이라고 하진 못하겠다. 다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매우 매우 둔감해졌다. 양 웬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될 일과 안 될 일은 따로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오래 고민해봐야 별다른 소득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껏 할 수 있는 건, 내 멋대로 살되, 남에게 피해 주는 일, 시쳇말로 민폐 끼치는 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지는 쪽으로 내 행동은 변해왔다. 다르게 말하면, 왠만한 일은 내 생각대로 하고, 다만 다른 사람 귀찮게 하는 일은 안하거나 최소화한다 정도 되겠다. 그러고나서도 나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지니거나 날 미워한다면 그건 글자 그대로 out of my control. 


이런 식으로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평판에 대해 민감한 사람을 보면 좀 안쓰럽다. 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담.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손 털어버리면 되는 걸. 거기다 대고 "난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나를 그렇게 생각해?"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간다면 "난 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이런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응, 정신 나간 짓다. 이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해보면, 다른 사람의 뒷담화에 귀기울일 필요는 제로에 가까워진다. 내가 잘 하고 있다 생각하면 그런 생각들은 오해고, 그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거니 신경 끄면 된다. 신경 꺼야 할 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다. 반대로, 그들이 보는 게 그게 진실일 수도 있다. 그럼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 거고, 그럼 내가 이런 소리 듣고 살아야 되나,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하고 이 꽉 물고 내 행동을 고치면 되는 거다. 이런 방식의 사고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들어가는 마지막 제약 조건은, 대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 생각이 옳을, 또는 그 방식으로 사는 게 편할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 이런 점까지 감안하고 내 행동을 결정한 다음, 거기에 책임지면 된다. 


퇴근길에 자기 뒷담화하고 다녔냐고 K가 '추궁'한다. 성질 그대로 받아쳤으면 언성이 꽤 높아졌겠지만 일단은 사실이 아닌 점을 다 밝히고 매우 불쾌하였다 붙였다. 얼래, 지가 더 기분나빴다며, 추궁이 기분나빴다'면' 사과드린단다. 조건부 사과다. 자기가 뭘 했든간에 누구도 자기 뒷담화를 할 순 없다. 그리고 차원이 다른 선민의식. 그래, 이제 너에 대해 정확히 알겠다.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4. 8. 23. 14:37

아직 보스가 나를 K선생이라 부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지. 보스와 첫 만남때 나온 이야기니까. 


"김선생이나 나나 서울대 나온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김선생이나 나나 실수라는 걸 하면 안 되. 우리는 그게 그냥 실력으로 받아들여져요. 세컨 찬스라는게 잘 주어지지 않는다고. 이건 뭐, 사회생활 오래 한 김선생이 더 잘 알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 세컨 찬스라는 게 정도를 넘을 때가 가끔 있다. 어느 정도냐면, 잘 할때까지 계속 기회라는게 주어지는 것 말이다. 똑같이 빵꾸내도 지속적으로 그사람을 믿고 기회를 주게 하는 것. 사람 능력 다 거기서 거기고. 그러면 정말 실력을 못 쌓을 사람 얼마나 있겠나. 이렇게 삐딱하게 그들의 '프리미엄'을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삶의 가장 큰 원동력이 '지잡대 컴플렉스'이기 때문이다. 그걸 연료태워 이제껏 버텨왔다. 그런 입장에서 서울대 출신들이 가지는 유형/무형의 프리미엄이 눈에 보일 때마다 속이 쓰린다. 내색을 안 하려 노력할 뿐이다.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