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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01 돌아갈래?
  2. 2013.05.26 손석희
  3. 2013.05.25 반면교사
  4. 2013.04.19 보험약관대출 상환 완료
  5. 2013.04.18 오늘
  6. 2012.12.20 한 시대의 끝
  7. 2012.12.17 추적자의 예견
  8. 2012.09.02 우파의 불안
  9. 2012.06.10 스물 다섯살의 기억 2
  10. 2012.04.30 빈곤과 벗하며.
打字錄2013. 9. 1. 02:25

늦은 오후, 옛 직장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이양반 참 묘한 양반이다.


흔히들 말한다. 능력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사람. 샤프하고 빠릿빠릿하면서 꼼꼼한, 그래서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 그런데 자기 공을 챙기지 않아 언제나 뒤로 밀리는 사람. 그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교육파견 형식으로 직장을 1년간 떠나야 했던 석사 시절, 나보다 두 직급 위의 그 선배에게 내가 하던 업무를 인수인계했다. 모양새만 보면 웃기기 그지없다. 7급 사원 나부랭이가 4급 과장에게 인수인계하는 모양새가. 사실 정규직 정원만 천 명이 넘는 조직의 조직/개인평가를 7급 말단 혼자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였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양새를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정치인 낙하산 인간쓰레기... 아, 이 개자식 이야기는 이 글 말미에 다시 나오게 된다. 무튼간에, 인수인계 과정을 본 선배들은 옆에서 이렇게 낄길댔다. "야, 7급이 4급 가르치네. 매너놈 부사수 빨리 둬서 좋겠다야. 그것도 과장님 부사수를..." 미친... 


시간은 흘러흘러 1년 뒤, 내가 일을 가르친(?) 그 선배의 부사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미 마음이 회사를 떠난 지 오래였던지라, 일은 내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놓고 참 많이 개겼다. 인간쓰레기 팀장이 헛소리하면 네 그러심니까... 그럼 저도 모릅니다... 내일 뵙죠 바이바이. 이런식으로 첫 회사생활의 마지막 1년을 보냈다. 그 덕에 그 선배만 죽어났다. 


그리고 엊그제 걸려온 전화. 외부경영평가 지적사항에 대해 새 판을 짜려고 하는 모양인데 뭔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선배 말을 들어보니 "업계"에서 자주 하지만 실제 회사에서는 잘 모르는 일이었다. 정확한 지적사항을 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에프터서비스 개념으로 판 짜드리겠다고. 그리고 이메일로 옛 직장의 전년도 경영활동 평가결과를 받았다. 


죽죽 읽어나갔다. 내 밥줄이 아니다보니 이렇게 재밌는 글이 없더라. 더욱 재미있던 것. 인간쓰레기 팀장이 새 판을 짜려 했고, 일년 내내 안된다, 못한다, 악에 받쳐 싸우다가 개새끼 먹고 떨어져라 하고 팀장 뜻대로 해 준 일로 인해, 기관 전체 평가가 제대로 엿을 먹고 있었다. 조직/개인 평가에 대해 별다른 고민없이 불만만 통제하려고 잔머리 굴린 댓가라 4년째 조직을 수렁에 빠뜨리는 모양새를 보니, 안타깝기 전에 실현된 예언에 대한 쓸떼없는 자긍심(?)과 희열이 먼저 기어나왔다. "씨방새, 지맘대로 판 짜서 싸지른 똥에 쳐박혔으니 소원대로 됐구만."


나야 웃고 그만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불쌍하고 엿같은 이유는, 얼마전 다시 평가팀장으로 그 인간쓰레기가 복귀해서 뻘짓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개새끼가 싸지른 똥덩어리가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군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ㅠㅠㅠㅠ " / "어 거 어케 알았어. 오늘 그거 뜯어고치려다 또 보류했는데 공문까지 다 날렸는데 다시 생각한데~ 켁!" 역시 지버릇 개 줄까. 한 번 개새끼는 영원한 개새끼다. 어지간한 인간들에게는 다 인사하고 회사를 나왔지만, 그 작자는 면상 마주한 순간 내 자신을 통제할 자신이 없어 보지도 않았다. 그러길 잘 했다. 좌우간 난 답장을 보냈다. "좌우간 판 짜서 보내드리겠슴다~" 


공부하기 싫을 때 하는 짓이 있다. 예전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최근 소식과 인사를 둘러보거나, 검색엔진에서 옛 직장 소식을 검색해 본다. 여전히,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삽질을 계속 하는 걸 본다. 그러면 다시 앞으로 갈 동력을 얻는다. 


논문자격시험은 이번 주다. 주여, 제 스스로 글감옥에 갇힌 자에게 은총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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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13. 5. 26. 11:25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52

 

"출연진과 아이템에 대한 회사 측의 간섭은 ‘일상’이 되다시피 했고, 토요일 방송을 없애는 과정에서도 진행자의 뜻은 배제됐다. 그중에서도 손 전 교수가 가장 맥 빠져한 건 라디오국 젊은 PD들의 무관심으로 보인다. 회사와의 오랜 투쟁에 지쳤을 법도 하지만, <시선집중>에 와서 힘을 보태주길 바랐던 후배들의 외면에 상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손석희의 종편행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 중 가장 와닿는 이야기는 저것이다. 자신의 인생항로를 급선회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절망적인 미래가 눈 앞에 훤히 펼쳐질 때다. 손석희의 '도박'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그의 건투를 빈다.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3. 5. 25. 22:56

가끔 다시 공부 시작한 게 삽질이 아니었는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와, 연구비 입급일 사이의 괴리를 느낄 때가 대표적인 타이밍이다. 그것 이외에도 정말정말 책과 논문이 안 읽힐때도 그렇다. 그럴때마다, 난 검색엔진에서 내 옛 직장을 검색해 본다. 뉴스에서 보이는 이런저런 홍보활동을 보면, 무슨 삽질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 가끔은 아예 공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조직도와 보직자들의 변동을 보기도 한다. 이전만큼, 혹은 이전보다 더한 삽질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이 그래도 낫다는 생각이 다시 돌아온다. 아직까지 내 전 직장은, 그런 점에서 내게 도움을 주고 있다. 내년이면 강원도로 옮겨 갈 그동네에서, 계속 삽질하시길 기원한다. 내 기원과 상관없이 그러겠지만. 언젠가는 돌아가게 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을이 아니라 갑으로.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3. 4. 19. 13:00

집구석 마련시 옆지기의 현금 흐름이 조금 안 좋았다. 그래서 내 보험약관대출로 천만원을 대출받아 보태준 것이 작년 12월 말이다. 이제야 돈을 받아 갚았다. 넉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동안 이자로 나간 돈이 정확히 18만 5464원. 대략 5.56%정도의 금리다. 중간에 조금 금리가 내리긴 했지만 쎄긴 쎄다. 어쨌든 대출금 갚은 것은 좋은 일. 저 돈은 내 최후의 보루다. 박사논문 쓸 때 수입없이 반년에서 일년을 버텨야 할 때, 아마도 저녀석을 깨서 써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럴 일 없이 조금씩, 꾸준히 저축을 하는 게 더 좋겠지만. 


직장에 있을 때, 마이너스 통장을 써 본 적이 없다. 자랑이라 할 것도 없다. 내가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 것도, 밖에서 사람 만나는 것도 즐기지 않는, 오타쿠 취향의 자린고비임을, 그리고 부모님께 꽤 오랜기간 얹혀 살던 패러사이트 싱글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예일 뿐이다. 그러던 내가 결혼하면서 주택담보대출을 끼고 집을 사고, 보험담보대출을 얻어 급전을 막았다. 


천만원을 다 상환하려다 잠시 고민했던 일. 연구비 선금 신청이 늦어져 넉 달치 연구비가 이번달 말에 나올 수도, 다음달 말에 나올 수도 있다. 전자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후자라면 몇십만원 정도 카드비가 빵꾸날 거 같았다. 백만원정도 상환하지 말고 둬 볼까 잠시 고민했다. 백만원 두면 한 달 이자가 오천원 남짓.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보험담보대출이야 은행 홈페이지에서 언제나 신청만 하면 바로 나오는 거 아니던가. 그렇다면 굳이 이자를 퍼 주면서 대출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바로 다 상환했다. 그러고 약간 편안해지는 마음. 


점심으로 사발면을 후배와 먹었다.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3. 4. 18. 01:17

늦잠을 잤다. 어제 새벽까지 옆지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탓/덕이다. 결국 아침을 간신히, 빠르게 먹고 학교에 갔다. 중소기업과 혁신 과목의 숙제를 했다. US의 신규 기업 법적 형태에 관한 논문을 간략히 요약해서 에세이를 두 개 썼다. 계량경제학 동영상 강의를 세 개쯤 듣고 읽고 연습장을 빡빡히 메꾸어 나갔다. V와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휴게실 다녀온 것, 화장실에 두어 번 다녀온 것, 커피를 뽑기 위해 물을 떠온 것 말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섯시가 조금 못 되어 일어서자, 눈이 뻑뻑했다. 


LG아트센터에서 나윤선님을 뵈러 갔다. 로비에서 그녀의 동생이자, 나의 웨딩사진을 찍어 주신 나실장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조만간 인사하러 가야 할 텐데... 아, 그전에 옆지기와 만나 버거킹 와퍼 1+1행사로 저녁을 때웠지. 4월 말까지 하는 행사 덕에 저렴하게, 즐겁게 먹었다. 다행이다. 


공연. 온 몸이 악기, 몸짓 하나하나, 음색 하나하나, 두성, 흉성, 가성, 그리고 내가 모르는 영역의 소리 하나하나를 뽑아내는 그녀가 온전히 여러 음색을 지닌 악기였다. 그리고 울프 바케니우스의 기타... 나는 테크니션을 존경한다. 아니, 경외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듣기 만만치 않은 곡을, 남이 듣기 좋은 곡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곡을, 즐기는 그녀가, 참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업계 최고의 사람들과 밝게 웃고 떠들며 즐기는 모습까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이제야 조금씩 적어내려가는 내 쪽글이, 조악한 이론이, 업계 고수들과 묻고 답하기가 될 정도까지 올라설 수 있을까. 


옆지기를 재촉해 집에 생각보다 조금 늦게, 그렇지만 일찍 왔다. 오자마자 손발을 씻고, 이를 닦자마자 다시 책상위에 앉았다. 계량경제학 강의를 다시 들었다. 옆지기는 책을 몇 권 들고 안방으로 갔다. 강의를 한시간쯤 들었다. 중간에 몇 번, 강의를 세우고, 교재를 찾아보았다. 막혔던 것 몇 가지가 뚫렸다. 다행이다.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 남은 강의를 들어야한다.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2. 12. 20. 14:58

어제 책상 앞에 앉아 읽히지 않은 책을 읽고, 써지지 않는 보고서를 쓰다가 잠이 들었다. 보고서는 마무리 하지 못했다. 그러고 멍하니 버스를 타고 연구실에 왔다. 고작 내가 '비판적'으로 지지한 후보가 떨어지고, 본능적 거부감에 면상도 보기 싫은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 시대가 닫힌 걸 실감해서이다. 거시적 차원의 시대변화를 즉자적 차원에서 의미부여하는 짓거리는 유치찬란한 짓이자 미성숙의 증거임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힐 정도로 내 생각이 여물지 못했으니 어쩌랴. 


15년 전 수능 마치고 특차로 지방의 공대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먹은 때였다. 그때 내 동명이인이 경합끝에 당선되어 국민의 정부가 열렸다. 그의 취임 첫 해는 내 대학 입학 첫 해이기도 했다. 집구석에서 떨어져 수원에서 기숙사 생활과 과외를 하며 읽고 쓰는 생활을 시작했다. 시덥잖은 연애질과 도서관 섭렵, 종이접기와 같은 잡스러운 취미생활을 헤메이다 토익을 보고 군대에 갔다. 적당히 빡세고 적당히 널널한 군대에서 셜록 홈즈를 영어로 읽고 일기를 썼다. 병장을 달 때 즈음, 노무현이 광주 경선의 기적을 일으키며 여권 대선주자로 떠올랐다. 적잖게 그에 열광했다. 아, 빼먹을 뻔 했다. 이번 대선 이상의 딜레마와 좌절을 안겼던 2002년 지방선거의 서울시장 부문. 가카 VS 김민새. 대책없는 청계천 갈아엎기와 노가다판 끝판왕, 그리고 악질 운동권 괴수와의 대결. 고민하다 가카 한성부 입성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김민새를, 아주 더러운 기분으로 찍었다. 그때부터 시작한 비례대표는 별 고민없이 민주노동당을 찍기 시작했다. 


내 동명이인 이상의 우여곡절을 거쳐, 참여정부 시대가 열렸다. 내가 열렬히 지지한 정치인의 집권에 처음으로 찝찝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른다. 참여정부를 설명하는 국정홍보처의 캐치프레이즈를 공모한 결과가 고작 "어서오십시오, 참여정부입니다" 라니. 감각이 그렇게도 없나 이놈의 노친네들. 혀를 끌끌 차다가 대북송금 특검을 받았고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소리에 짜증을 냈다. 그때즈음 복학해서 모가지 내 놓고 공부하며, 랩실 생활도 조금 하며 일도 해 봤다. 부안 방폐장 아사리판에 기가 막혔다. 일년 일과 공부와 과외하다 지쳐 휴학했을 땐, 탄핵 사건에 기막혀했다. 그날 한겨레 만평에 탄핵을 거꾸로 하면 핵탄이 되어, 여의도 국회에 핵탄두가 터지고 조순형 의원과 최병렬을 희화하한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혀를 끌끌 차며 어차피 다른사람이 다 찍어 줄 테니까 안심하고 민주노동당 지역구 후보와 비례대표에 별다른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었다. 그러고 6주간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파리의 민박집에서 대통령 탄핵 무효 소식을 들었다. 돌아와서 공부를 계속하려던 진로를 바꾸어 공기업 입사 준비를 시작했다. 노통은 여전히 짜증을 부렸고, 열린우리당은 지지부진했다. 


노통 집권이 반환기를 돌기 조금 전, 조그마한 공공기관에 노가다판 공돌이로 취직을 했다. 노통의 성은을 제대로 입었다. 공공기관 입사시 학력 철폐로 인해, 졸업예정자도 아니었던 휴학생인 내가 원서를 넣을 수 있었다.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는 선배와 최종면접장에서 만났다. 나는 붙고 선배는 떨어졌다. 그 덕에 학교에 인사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학부 졸업도 못한 놈에게 대학원 졸업자가 밀려서 분위기 더럽다나 뭐라나... 나를 랩실에 잠시 두던 교수님은 절대 네버 취직하지 말고 대학원 오라고 했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첫 발령지 울산에 짐을 꾸려 내려갔다.


첫 발령지 울산에서, 조용히 읽고 쓰고 듣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거기서 황우석 사태를 만났다. 노통이 미쳤다고 생각했다(아주 나중에, 그러니까 얼마 전 한학수 PD 대학원 강연 질의응답때 들은 바로는, 청와대 민정 라인은 끝까지 몰랐고 - 그러니까 무능했고 - 안기부와 과기 라인은 사태를 파악했으나 보고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덧붙여, PD수첩 2부 방영 전날 찾아온 참여정부의 전직 장관은 청와대의 밀명을 받고 움직인 게 아니라, 그사람도 속아서 자체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라 한다). 전작권 환수와 관련한 노통의 대갈일성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에는 짜증이 버럭 났다. 


그때 즈음 노가다판 공돌이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의 본부 기획실로 갔다. 조직평가/개인평가를 맡았다. 노가다판에서 벗어나면 이런거 안하겠지 하는 생각은 착각뿐, 모든 걸 다 해야 했다. 필요에 따라 10만줄짜리 엑셀을 만지기도 했고, SQL을 익혀 성과관리시스템 손을 봐야 하기도 했다. 이런 데 시달리다보니 대연정은 개소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김용철 변호사와 삼성 특검이 떠올랐다. 삼성 계열사의 재무부서에 다니는 친구녀석은 자료 폐기를 비롯한 각종 살벌한 업무에 시달리다 사표를 내고 증권사로 옮겼다. 그리고 가카가 등장했다. 2007년 울릉도로 혼자 여름휴가를 떠나는 묵호항 터미널에서, 박근혜가 경선 패배에 승복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BBK가 터지고 민주당의 방황과 함께 민주노동당이 "코리아 연방"이라는 뜽금포를 터뜨리고 나왔다. 문국현은 눈에 비치지도 않았다. 판은 끝나 있었다. 더러운 기분으로 권영길을 찍으면서 뇌까렸다. "씨발 3%이상 나오지 마라." 정말 3%나왔다. 그리고 가카 RISE...


가카의 어렌쥐 인수위 시절, 노가다판 공돌이는 기획실 평가담당 머슴으로 변해 있었다. 12/31일 시무식 마치고 집에 갔다가 기획실 전원 출근하라는 소식에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한나라당 100대 공약에 맞춰 무슨 일을 할 건지 1/2 아침 9시에 인수위에 보고한다고 했다. 한반도 대운하에 맞춰 한국의 교통체계 선진화를 앞당기고 어쩌구 하는 개소리를 와꾸 맞춰 쓰며,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강도의, 최악의 자괴감을 느꼈다. 그 이후의 변화? 변방의 찌질한 공공기관 말직에 있어도, 정말 이 작자들 갈때까지 가는구나, 이런 말이 나오는 상황을 꽤 자주 목격했다. 명박산성과 고소영 이런 거 다 재껴두더라도 말이다. 조금만 이어붙이자면 고대출신 이사장이, 현대 출신/소망교회 집사가 사외이사로 왔다. 하다못해 기획팀장까지 고대 출신 쓰레기가 내렸다. 매일매일을 그 쓰레기와 싸우며 살았다. 더는 못해먹겠다 싶을 때, 행정학 석사 과정 1년짜리 교육 파견 기회가 생겼다. 모가지 내 놓고 한달간 TEPS를 준비해서 간신히 교육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석사 첫 학기가 끝날 무렵, 회사를 관 두고 계속 공부할 결심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회사 생활 1년. 레임덕인지 숨어지내는지 모르는 가카와는 별개로, 회사는 전보다 더 지랄맞았다. 나는 전처럼 머슴같이 일하지 않았다. 짜증 낼 일은 짜증 내고 화 낼 일은 화 내면서 전보다는 속 편하게 회사를 다녔다. 그리고 올해 2월, 마음 편히 사직서를 썼다. 지난 1년, 무언가 어수선했다. 교수님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도, 공부도,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두 번째 학기에는 석사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계실습을 강의를 시작했다. 몇 번 헤멨다. 수업은 따라가기 벅찼다. 몇 번 빠지기도 했다. 한 학기가 끝나간다는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박근혜의 부상과 민주통합당의 지리멸렬함은 짜증스러웠다. 공부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데 대한 짜증과 같이 상승효과를 불러 일으켜, 올해 하반기의 학교생활을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두 개는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게 사실일 게다. 하지만 그런 외부의 짜증, 그로 인해 "비판적 지지"를 할 수 밖에 없던 불만족스러운 심리 상태가, 학업에 영향을 미친 건 일정부분 사실이었으니까. 이것도 내가 정신 덜 차린 탓이긴 하지만. 하여튼 이러한 불만족과 짜증의 귀결은 만족스럽지 못한 기말 시험 두 개와, 박근혜의 집권이었다. 


박근혜의 얼굴이 크게 실린 조간신문을 보며, 모래알같은 밥을 삼키고 학교 오는 길에, 민주당 정권, 내 동명이인과 노통 집권기에 보낸 20대, 대학생 시절과 직장 초년생 시절이 묘할 정도로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저질 낙하산과 무능한 노친네들의 지시를 받을 수 밖에 없던 직장생활 중/후반부가 가카 집권기와 맞물려 돌아갔던 게, 이상하게 아귀가 잘 맞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닥 만족스럽지 못했던, 엉망진창이었던 지난 학기를 박근혜의 승천과 민주통합당 및 좌파들의 지리멸렬과 함께 병렬적으로 생각해 보니, 이것 역시 이상하게 잘 어울리는 것 처럼 보였다. 그 종착점이 박근혜의 집권이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공부하는 학생이 아닌, 직딩의 정신상태로 학교에 "출/퇴근"했던 것 같다. 두 가지가 모두 지리멸렬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던 게 아닐까. 지리멸렬한 시대의 끝자락과, 아직 직딩의 허물을 벗지 못한 내 지난 일년. 그걸 생각하니, 이제야 내 직딩으로 뭉쳐졌던 지난 삼십대 초반이 완전히 닫힌 것 같았다. 


박근혜의 5년. 그 안에 나는 읽고, 쓰며, 그러다가 졸업을 할 것이다. 그때 되면 포닥이든 뭐든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고. 그때는 박근혜 집권 말기가 될 것이다. 여전히 민주당 계열과 좌파는 지리멸렬할지도 모르겠다. 그것과는 별개로, 읽고, 쓰는 일을 꾸역꾸역 해 나가며 계속 난 헤멜 것 같다. 이왕 헤멜 거, 조금은 즐거운 게 더 나을 거고, 조금은 더 낙관적이어야 할 게다. 잡념과 distraction을 줄이고 읽고 쓰는 데 집중해야 하니까. 어쨌든 이렇게, 한 시대가 완전히 저물었다. 건조하게 말하자면 내 이십대에서 삼십대 초반이 지나갔고, 느끼하게 말해서 "내 젊음이" 완전히 소진되었다. 내년 내 나이는 서른 다섯이다. 




p. s. 흐름상 연애 이야기는 제외했다. 두달 후면 유부남이 될 사람의 마땅한 도리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조만간에 읽을 "그 분"이 양해해 주시겠지. =)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2. 12. 17. 13:12

학교에 와서 선후배들과 대선 관련 이야기를 하다 든 잡상 몇 자. 


올해 유심히 본 드라마 중 하나는 "추적자"이다. 결코 대통령이 되지 말아야 하는 강동석(김상중)을 떨어뜨리기 위해, 백홍석(손현주)은 모든 걸 던진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그는 "아빠"로서의 목표를 이룬다. 김상중 낙선. 그리고 이정길의 얼굴을 한 야당 대표가 당선된다. 재밌는 점. 그 야당 대표는 어떠한 사람인지, 드라마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전혀. 단지 당선결과 발표를 알리는 텔레비전 수상기 화면에 이정길의 얼굴만 지나갈 뿐이다. 그가 어떤 자격을 지녔는지, 어떤 사람인지, 드라마는 묻지 않는다.


물론 그런 과감한 생략과 함께 주된 줄거리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기에, 드라마의 극적 긴장은 끝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디테일을 다루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과감한 생략이라는 점을 작가도, 감독도 잘 알고 있었다. 칭찬해 줄 만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실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웃기 어렵다. 


왜 한 사람을 떨어뜨려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너무도 많다. 반성없고 몰상식하며 비윤리적이다. 그는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 SNS를 위시한 온라인 세계는 온통 그를 떨어뜨리기 위한 격문으로 가득 찬다. 특히 토론이 있는 날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왜 그의 반대자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윤여준의 지지 연설 정도였을까. 즉자적 차원의 윤리와 인격에 대한 긍정적 표현 이외에, 나는 그를 지지해야 할 실증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 


나는 지금 드라마에서 칭찬했던 광경의 실제 상황을 보고 있다. 과감한 생략으로 주된 스토리 라인의 몰입력을 높이는 방식을 칭찬하는 건 가상의 세계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그가 왜 대통령 자리에 올라야 하는지,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 "이쪽 세상"의 사람들이 이상하고 또 무섭다. 누구 말마따나, 이상스러운 그 열광 뒤에 가리워진 절망을 볼 수도, 인정할 수도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왕 글을 쓰기 시작한 거, 다 솔직히 말하자. 드라마가 아닌 실제 세상이기에 내가 느낌 감정은 공포에 가깝다. 바닥에 떨어진 지지도가 추동력을 받고 올라간 원인은, 모두 캠프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왔다. 만약 그가 당선된다면 이는 왜 그를 지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캠프보다는, 바깥의 동력에 의해서이다. 그렇다면 그 공도 바깥에 돌려야 하고, 그에 따른 권리와 정치적 책임 역시 바깥에 물어야 옳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결코 아니다. 후보 당선의 원인이 캠프 바깥에 있음에도, 당선에 따른 권리와 책임은 원칙적으로 캠프 내부에 임한다. 까놓고 말해 붙어놓고 쌩까면 끝나는 거 아닌가. 그때 와서 속았다 가슴을 칠 것인가. 지금 이런 지리멸렬함을 보여주는 그들이 국정을 과연 잘 운영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어떤 때보다도 사나운 야당으로 돌변할 그들 앞에서. 


꿈도 희망도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본능적 혐오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쪽에 도장 찍고, 하루 온 종일 읽고 쓰다 맥주 한 캔 하고 그대로 잠들 것이다. 


아, 정말 하고 싶은 말. 작가가 의도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강동석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대의 하나로 똘똘 뭉친 "깨어 있는 시민"들의 묻지마 지지로 인해, 드라마 전체에 얼굴 한 번 내밀어 본 적 없는 야당 후보가 당선되는 촌극을 정의사회 구현과 희망의 승리로 비장하게 그려 낸 연출력에는 경탄을 금치 못하며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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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12. 9. 2. 00:47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둘 사이에서 진동한다. 현상을 보이는대로, 가장 명쾌하고 단순하게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상관없어보이는 배후의 작동논리를 하나하나 캐어가며 그 현상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줄 것인가. 나는 둘 중 하나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단지 전자의 단순명쾌함이 더 설득력있는 일이 있고, 후자의 섬세한 논리와 상상력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 있을 뿐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거칠게 분류하면 저 둘로 분류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나는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최대한 단순히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 생각에 이 영화에서는 "배트맨 비긴즈"에서 보여 준 브루스 웨인의 섬세한 감정의 흐름과 성장담도, "다크나이트"에서 보여 준 골아픈 딜레마도 없다. 노골적이고 직관적이며 단순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파의 공포를 펼쳐보인다. 그렇기에 "다크나이트"에 찬사를 보냈던 사람들의 실망과 불만은 그만큼 온당하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해 쓴 글 몇 편을 둘러보았다. 많은 이들이 놀란의 전작에 비교하며 적잖은 실망감을 내보였다. 허술한 내러티브와 고약한 정치적 함의에 대한 불쾌함을 내비치는 글이 그런 류다. 그에 반해 이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3부작의 마무리로 "완벽하진 않지만 만족"스럽다고 말하며 이렇게 강변하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장대한"서사시의 마지막을 그려야 하겠냐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적극적인 옹호도 있다. 미디어스에 여섯 편의 연작평론이 그렇다. 이 글에서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스키마를 엮어간다. 이러한 다양하고 섬세한 논리로 베인의 혁명을 좌파들의 움직임과 겹쳐 보는 것은 오독이라 주장한다. 과연 그래야 할까. 내 생각에 이 영화는 그것보다 훨씬 단순하다. 불완전한 지금 세상에서, 그나마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우파들이 무엇을 공포스럽게 느끼고 있는가를 온전히 펼쳐낸다. 


에너지는 현대 문명의 근원이며 기술권력의 정점이다. 웨인 컴퍼니가 개발하고 있던 핵융합 원자로가 바로 그 상징이다. 온전하지 않고 불안하지만 그나마 이를 위험하지 않게 다룰 수 있는 건, 현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쪽 뿐이다. 그나마. 그. 나. 마. 베인을 비롯한 "불만세력"들은 영화 시작부터 그러한 권력에 손을 뻗는다. 그들은 이를 관리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저 현 사회에 '전반적으로' 불만을 가진 그들은 그저 현실을 부정할 뿐이다. 고담시를 권력자들에게 뺃어 되돌려주겠다고 하나,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독한 혼란, 혼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기괴한 법정을 노골적으로, 세밀하게, 자세히, 몇 번이고 비춰보여준다. 고담의 처절한 고립 역시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불만세력"들이 말하는 세상을 엎어봤자 지구화된 이 세상에서 고립될 뿐이라고.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 아니라 고립을 당할 뿐이라고. 미식축구장이 무너진 뒤 배트맨이 돌아오기 전에 온전히 펼쳐지는 암담한 고담시의 풍경은 바로, 현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우파들이 "불만세력", 아니, 적나라하게 쓰자. 좌파들이 장악할 세상에 대한 공포다. 


결국 고담에는 평화가 돌아온다. 그러나 이를 되찾아오는 주체들의 맨 앞에는 자신의 부와 정의감을 남김없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발휘하는 배트맨/브루스 웨인이 있다. 그리고 그 뒤를 배트맨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인해 "길이 뚫린" 경찰, 불완전한 공권력이 뒤따른다. 브루스 웨인의 실패와 고난, 좌절, 그리고 너무도 쉽게 베인의 덪에 빠지는 공권력의 무능함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우파들이 그리 완벽하지 못함을, 아니, 적잖게 무능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살만한 세상을 지키기에는 지금의 세력이 낫다고 말한다. "부를 세습한" 브루스 웨인의 호의와 덕성, 그로인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불완전하고 부분적으로 무능해도 "그나마" 선의를 지켜가는 공권력이 왜 나은지를 세 시간 가까운 스펙터클을 채우고 있다. 바로 이런 연장에서 정성일의 빛나는 통찰이 나온다. "2011년 뉴욕이 1789년 파리에 느끼는 창백한 두려움"


당신이 지금 세상에, 특히 지금의 우파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이 영화를 보고 불쾌함을 느낌이 마땅하다. 마이클 만 이상으로 도시의 내음과 그 매력을 온전히 담아내었다 해도, 사이버펑크에 가까운 배트맨과 그 장비들의 판타지가 이러한 도시의 현실성과 그 아무리 조화롭다 해도, 우파가 꿈꿀 수 있는, 개선의 정(살기 위해 범죄를 벌였다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 '자기 힘으로' 발버둥치는)이 최대한 남아 있는 악녀 셀레나 카일이 제아무리 매력적이기 해도,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는 희망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서사의 고약함을 덮지 못한다. 남는 것은 아이맥스에 담아내는 스팩터클의 매력 뿐이다. 다만, 그것이 너무, 너무, 너무, 강할 "뿐이다". 


p. s. 나는 사실상 마지막 문장인 앞 끝자락에, 따옴표를 달았다. 용산 아이맥스의 가장자리에서 한 번, 출장다녀와 갑갑하던 팔월 중순의 어느 날 조조로 왕십리 아이맥스에서 한 번, 그렇게 두 번이나 보아 놓고서, 이러한 스팩터클을 "뿐이다"로 폄하하는 건 솔직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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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12. 6. 10. 10:55


토마스 체헤트마이어 현악사중주단의 슈만 현악사중주 1, 3번 음반이다. 금요일에 여자친구 집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발견하고 지화자를 외치며, 반어거지로 뺏어왔다. 저 표지를 보는 순간, 2003년의 가을이 생각나서였다.


수학과외 두 개와 함께 죽자고 공부하던 복학생 시절이었다. 오후 두 시 수업이 끝나고 잠깐 짬이 날 때, 기숙사 앞 벤치에 누워 1FM의 명연주 명음반을 들으며 이런저런 잡서를 읽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건너방 살던 인도 녀석이 "야, 어떻게 너는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냐?"는 물음에, 넌 윈도우 쓰면서 멀티태스킹도 안 하냐고 받아치며 웃던 시절이다. 과외로 한 달에 60만원을 벌고, 그 중의 절반을 저축했다. 휴학하고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0만원으로 한 달을 사는 건 꽤 퍽퍽했다. 책은 주말에 서울가서 헌책방 돌아다니며 만원에 몇 권을 샀고, cd는 고클래식의 중고 장터를 열심히 뒤졌다. 듣고 싶은 신보도, 탑 프라이스 음반 15,600원이 만만치 않아 속만 끓였다. 그 갈증을 달래기 위해, 1FM의 명연주 명음반을 통채로 녹음해서 들었다. MP3치고 지직거리는 음질도 문제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연주자들에게 댓가를 치뤄 주지 못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고작 이렇게 다짐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내가 돈 벌게 되면, 녹음한 음반들, 반드시 cd로 사서 들어야지." 그런 음반 중 가장 대표적인 아이가 저것, 내가 가장 열심히 서양고전음악을 듣던 2003년 가을, 그라모폰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된 토마스 체헤트마이어 현악사중주단의 슈만 현악사중주 녹음이다.


들어보면 일단 다른 cd들과 차원이 다른 음질에 놀라게 된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잔향과 칼 같이 딱 떨어지고 깔끔한 소리, 현악사중주 음반, 그것도 녹음이 많지 않은 슈만 현악사중주가 그라모폰 올해의 음반이 된 이유가 분명 있었다. 그때, 풍월당 가서 몇 번이고 이 음반을 들었다 놓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왜 못 샀으랴. 하지만 그당시 탑 프라이스보다 몇천원 더 받은, 2만원에 육박하는 음반값은, 무언가 마음의 장벽을 만들었다. 제대로 된 오디오도 없던 탓에 256Kb의 MP3로 들을 게 뻔하던 시절, 음질 좋은 CD는 사치일 따름이다라는 생각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술 한번 안 마시면 되는데. 그 생각을 하면서도 끝끝내 집지 못했다. 단지, 낙소스의 저렴한 음반이, 슈만 현악사중주 1~3번을 다 담고 있는 녀석으로 대리만족했고, 세 곡이 모두 익숙해졌을때, 저 음반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다시 학생이 되었다. 직장에서 받던 월급의 절반 이하를 연구보조비로 받으며 읽고 쓰는 게 전부인 일상을 살고 있다. 늦은 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새벽 한시가 허용하는 최대 볼륨으로 이 CD를 들었다. 기숙사 앞 벤치를 비추던 따사로운 햇볕과, 거기에 기대어 슈테판 츠바이크의 전기소설들을 읽고, 명연주 명음반에 귀 기울이면서, 싸구려 캔커피 혹은 커피우유를 빨대로 마시다가 꾸벅꾸벅 졸던 나의 스물 다섯살이 생각났다. 도저히 참기 어려워서, 쓰레빠를 끌고 편의점에 가서 캔맥주를 한 캔 더 사왔다.


"이윽고 그것은 내 눈 속에서 번졌고, 넘쳐 흐르다가,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로저 젤라즈니,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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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12. 4. 30. 22:54

3월 지출이 70만원, 자전거 구입한 돈을 빼면 52만원.

4월 지출은 35만원.


물론 손전화비와 교통비를 더해야 하니 실제 총 지출은 저 금액에 10만원 정도를 더한 게 맞다. 생각해보니 한 달 지출을 50만원 이내로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RA수입을 생각해보면 똔똔하고도 조금 더 남는 편이다. A에게, 공부를 다시 시작하며 수도승같은 삶을 살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 해 왔다. 적어도 지출의 측면에서는 이를 지켜가는 중이다. 쓸떼없는 군것질을, 충동구매(특히 책과 CD)를 줄이는 게 가장 크다. 대중교통의 경우, 한 정거장을 먼저 내리면 100원이 빠진다는 것을 알아낸 것도 성과라면 성과(사실 학교 샛길이 있어 한 정거장 더 가나 덜 가나 거기서 거기다).


지난 두 달간 한 일을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생각 이상으로 망쳐버린 고급계량 수업, 여전히 영어실력은 일천해서 외국 논문 좀 읽으려면 애로사항이 꽃을 피우고, RA과제는 점점 데드라인이 다가오고...


날이 더워지는 만큼 내 몸도, 머리도, 적당히 이완되고 풀려서 풀타임으로 돌려야 할 때가 왔다. 그 시동을, 내일 아침 수업 발제 준비를 잘 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별로 내가 좋아하고, 내키는 주제가 아니지만, 그렇기에 내 역량을 테스트해 볼 수 있겠지.


읽고 쓰는 게 업인 생활, 겨우 두 달 했다. 단지 그것 뿐이다. 실망도, 낙관도, 아직 너무 이르다. 그게 지금은 전부다.


p. s.  규칙적인 운동, 아침이 되었든 저녁이 되었든, 주 4회 이상 아파트 헬스장 가기. 아, 이번달 등록을 해야 하니 돈 나가겠구나. ㅜㅜ 다행히 5월달 행사로 인해 8개월을 12만원에 끊을 수 있는 걸 행운으로 삼아야겠지. 어디가서 그만한 시설을 월 1.5만원에 쓰겠나. 그런 행운에 감사하자.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