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字錄2012. 4. 12. 23:24

날짜에 구애받는 독서습관이 몇 가지 있다. 매년 2월 말이면 쇼팽의 생일을 기려 히라노 게이치로의 "장송"을 읽는다. 8월이면 리히터大人이 떠난 날을 기려야 한다. 지난주부터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를 틈틈히 읽은 이유도 그렇다. 4.3이다. 물론 "순이삼촌"을 읽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물 건너 변방, 한 나라이지만 권리를 챙겨먹기보다는 수탈당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던 기구한 섬과 섬사람들의 살림살이의 근원을 돌아보기에는 이 책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것은, 현기영이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제주도의 입말이었다. 이번에는 모르는 단어 하나 하나를 밑줄 쳐 가며, 사전을 찾아가며 읽었다. 재미있는 점. 내가 책상 옆에 두고 가까이 하는 사전은 남영신 선생의 "한+국어사전"이다. 이 사전에는 예문이 한국 문학/신문에서 뽑혀나온다. 내가 대개 몰랐던 단어는 제주도 토속어였는데, 그런 단어를 찾으면 예문이 바로 내가 찾은 문장이었다. "테우리"같은 단어가 그랬다.


이 책에는 두 건의 민란이 서술되어있다. 현기영의 설명대로, 방성칠난은 가혹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봉기가 촉발되고 스러저간, 단순한 민란이었다. 그에 반해, 박광수의 "망작"으로 기억되는 이재수의 난은, 가혹한 세폐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외세를 등에 업은 천주교의 권력 장막속으로 도피했다가, 그 세를 등에 업고 가혹한 세폐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다시 억압하는 과정에서 촉발된, 꽤나 복잡한 양상을 띄는 민란이었다. 그렇기에 방성칠난에서는 갈등의 축이 "제주 관아와 그 편을 드는 양반들 - 제주 백성"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데 반해, 책 하반부 이제수의 난은 "수탈당하는 제주 백성 - 교회의 세력을 업은 백성 - 제주 관아와 그 편을 드는 양반 - 그 틈에 어떻게 끼어보려고 하는 외세 - 중앙 조정"의 복잡한 축으로 전개된다.


주목해 읽어야 할 부분은 학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교회의 품에 안겼다가, 그 권세를 등에 업고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는 백성들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양상이다. 조금 비약을 해서 현실을 보자면, 별반 다르지 않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 현대의 공화국 시민들이 운/실력/세습에 의해 조금씩 나뉘어진 계급(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사이의 갈등이 과도하게 부각되고, 그것이 과도한 간극의 행위로 이어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대간의 차이, 지역감정으로 인해, 그리고 또 조금의 사회적 자본을 더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계급의 사람을 멸시하고 감정의 골을 세우고 그것이 또 정치적 의견과 표로 반영되고.


딱 논리적으로 이어지는 생각은 아니다. 복잡한 시기에 복잡한 갈등을 다룬 책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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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12. 4. 8. 00:42

A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길, 갑자기 나윤선이 생각나서 그녀의 가장 최근 앨범 Same Girl의 My name is Carnival을 들었다. 이날따라 묘하게 기타 소리에 귀가 기울여지더라. 그런데 중간을 넘기자, 아예 기타 소리에 더 집중하고있었다. 나윤선 목소리의 쉼표와 빈 공간을 완벽한 완급조절로 메꾸고 있었다. 동일한 음을 연타로 처리하면서도, 음 하나하나의 소리가 모두 달랐다. 심지어 손톱으로 기타줄 긁는 소리마저도. 그때서야 나윤선과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기타리스트에 생각이 미쳤다. 바케니우스 울프. 나윤선의 앨범은 나오는대로 사면서도, 그에 대해 너무 무심했다. 그의 음반을 좀 들어봐야겠다. 이번달 돈이 조금 남으면, 바케니우스 울프의 음반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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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12. 4. 6. 19:08

A와 본 건축학개론에서 유난스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랜드피아노를 들일 자리를 만들기 위해 설계를 다시 하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영화 한 켠에 피아노가 뭍어나오자, 난 자연스레 3년 전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결혼할 것이라 생각해왔던 C와 헤어지고 나서 별의 별 망상을 다 하고 살았다. 그때가 내 회사 생활의 절정기기도 했고. 본의 아니게 내 사수가 팀장에게 밉보여 한직으로 밀려나면서, 내 일에 대해서 그 누구도 터치못하던 시절, 무능의 극치를 달리던 팀장과 허구헌날 치고 받으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책과 피아노로 풀었다. 그리고 그당시만해도 환갑까지 조직에 몸 담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라 원주에 갈 거라 생각했다. 이왕 노총각 된 거, 그리고 할 수 있는 연애질은 다 해봤다고 착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원주 가서 마당 있는 집을 짓고, 그 안에 그랜드피아노를 들여다놓는 상상을 하곤 했다. 심심할때마다 중고 베이비 그랜드를 검색하는게 크나큰 소일거리였다. 4-5백 정도 하는 베이비그랜드를 삼십대 중반에 원주에서 독립하면서 방에 들여놓고, 퇴근하면 지칠때까지 건반을 짚다 잠드는 꿈을  꾸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에 나는 만 7년으로 내 첫 직장생활을 마감했다. 2년 전, 옆집이 없는 아파트 1층 맨 끝집으로 이사오며, 내가 애정을 담아 "돼지"라고 부르는 1988년산 131cm짜리 영창 업라이트 피아노를 들였다. 미래의 그랜드보다 현재의 업라이트를, 해가 떴을 때 만이라도 마음껏 연주할 수 있는 게 내겐 필요하니까. 하지만 지금도 그랜드 피아노를 다루는 꿈을 버린 것은 아니다.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서울이 아닌 공간에 자리를 잡고, 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할 지라도 그랜드 피아노를 방에 넣을 꿈을 지금도 꾼다. 할랑한 삶을 지향하는 내 망상의 상징같은 녀석이다. 베이비 그랜드가, 내겐 그렇다.


하루종일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다, 해질녘에 건반 앞에 앉아 한 시간 정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의 마지막 악장을 계속해서 연습했다. 태평양을 바라볼 수 있는 집에 놓여진, 카와이 그랜드 피아노가, 계속해서 눈 앞에 어른거린다.


하긴,그 전에, 돼지한테 뽑아낼수 있는 모든 소리를 뽑아낼수 있어야할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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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9. 3. 25. 08:51
쥔장과 sb군을 퇴근하고 만났다. 녀석의 집터에서 무언가를 시작한다고 하길래 게시판 하나를 달라고 했다. 되도록이면 그림같은거 몽창 빼고 텍스트만 넣어달라고 했다. 쥔장은 비웃듯 말했다. "그건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우문현답이었다. 

sb군이 사진 한 장을 보내달라고 말했다. 될 수 있으면 배경은 흰색으로. 이리저리 방구석 안을 둘러보다가, 피아노 의자를 밟고 한 컷 쳤다. 생각보다 흰색 계열이 도드라지지 않아서 흑백으로 바꿨다. 보낼때는 컬러와 흑백을 모두 보냈다. 둘 중 마음에 드는 걸, 녀석은 골라 쓰겠지. 없다면, 다시 하나 보낼게다. 오로지 흰색과 검은색만 존재하는 사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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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9. 3. 9. 00:56
"나 당신에게 프로포즈 안해요."

그렇게 알고 누나라 부르던 6년, 애인으로 지낸 3년의 세월을 닫은 지 이십일쯤 됐다. 술기운을 못 이겨 문자 몇 개를 보내고 전화 한 통을 걸었다가 바로 끊었다. 연애편지와 카드는 공장 파쇄기에 갈았다. 이런저런 장식이 붙은 카드는 파쇄기가 고장나는게 염려되었다. 카드에 붙은 작은 플라스틱 조각과 쇳조각은 먼저 떨궈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핸드폰과 컴퓨터에 남은 사진은 모두 지웠다. 인화해놓은 사진은 차마 파쇄기에 돌리지 못했다. 규격봉투에 넣어 세 장의 편지와 함께 그녀 집으로 부쳤다. 규격봉투에 두 장의 우표를 정방향으로 붙였다. 풀을 쓰지 않고 우표 뒷면을 혓바닥에 가져다 대고 두 바퀴를 돌린 다음 규격봉투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 붙였다. 공장 앞 문방구에서 그짓을 하다 보니 앞건물 통합DB팀의 J선배가 있다. 선배에게 오버스런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말을 섞다보니
그녀가 연하의 남자와 6월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말했다. 축하인사를 건내며 방금 전 옛 애인에게 뽑아놓은 사진을 부치고 돌아서는 길이라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J선배는 놀란 눈치였다. 을씨년스럽게 비가 내렸다. 

이별 후 출근없는 주말을 처음으로 맞이했다. 늦잠을 자고, 남대문에 안경을 하러 갔다. 3년. 간신히 한달 수입이 200만원을 상회하던 공장 2년차 첫자락에 무리를 해서 oliver peoples의 코받침 없는 안경을 장만했었다. 그 기간과 지난 애인을 만난 기간은 거의 일치한다. 매너놈이 가장 좋아하던 디자인의 안경테였지만, 그 미련을 놓을 때였다. 10년째 다닌 남대문의 안경점에 안경을 하러 가면서 피식 웃었다. 내가 미쳤지. 지난 한겨레에 쓴 글 처럼, 만원에 두장짜리 리어카 와이셔츠 애호가 주제에 올리버 피플스는 무슨. 네모난 뿔테를 찾다가 착용감이 편안한 국산 뿔테를 발견했다. 기본으로 불러주는 가격을 후려쳐서 2만원쯤 깎고는, 올리버 피플스 안경테 갚의 1/3도 안 되는 사각 뿔테를 장만했다. 유연한 안경 다리가 편하다. 안경사 아줌마는 안경다리를 연신 흔들며 메모리 소재 어쩌구 말했다. 사각 뿔테가 꽤 맘에 들었다. 

집구석 근처 동대문 도서관이 리모델링중이라 종로의 정독도서관을 걸어서 갔다. 네 권의 책을 빌렸다. 

박정희 정부의 선택, 기미야 다다시
  - 지난 12월 애인을 데리러 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눈에 들었다. 그때 비올라 가방을 메고 있던 커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었다. 여성은 자기 손이 현악기 할 손이 아니라 한숨지었고, 누군가의 손이 가늘고 기능적이라 현악기 할 손이라 부러워했었다. 왜 이런게 기억이 나는 걸까.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에케하르트/볼프강 슈테게만
  - 김규항 홈페이지에서 발견. 빠르게 흟어나갈 생각이다. 

피아니스트를 위한 손가락 체조, 무라카미 타카시
  - 토요일 안경 맞추고 돌아오는길에 들른 영풍에서 발견한 책. 피아노 앞에 앉지 않고서 손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참고할 예정이다. 

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 머릿속을 몇 시간동안 비워버릴 수 있는 일본 추리소설이 필요했다. 세 권을 빌리고 난 다음, 한 권의 대출 여유가 있었다. 정독도서관에 남은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책 중 유일한 한권짜리였다. 

정독도서관을 나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앞의 세 권 서문을 훓었다. 피아니스트를 위한 손가락 체조 간단한 걸 따라서 하고는, 용은 잠들다를 백 페이지정도 읽었다. 밥먹을 시간이 되어 집구석으로 돌아갔다. 용은 잠들다를 반신욕하면서 마저 읽고 피아노 연습과 일본어 공부를 하다보니 하루가 갔다. 

헤어진 이후 처음 맞는, 온전한 주말이 흘러갔다. 마음이 한결 더 차분해졌다. 충만한 주말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P선배가 발리 커피를 주었다. 단맛을 뺀 쌍화탕 맛이었다. 선배가 말한 '독특한 맛'이란 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이별 사실을 안 그녀는 적잖게 놀랐다. 그런 반응이 그녀뿐만은 아니었지만. 그전에도 애인과의 결혼문제, 좀 더 정확히는 혼수 문제를 이야기할때, 그녀는 말했다. 매너놈씨가 지쳐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애인님이 알아주길 바란다고. 공장 메신저 대화창에 뜬 그 이야기가 가슴에 박혔다. 그런 P선배가, 지난 금요일 오후에 말했다. 

행복해지세요. 

매너놈은 웃었다. 아주 활짝. 그럼요. 고마워요. 선배. 주말 잘 보내시라우. =)



새 안경을 하고 꽉 찬 주말을 보내고 난 지금, 매실주 200ml한 잔을 마셨다. 
사각 뿔테와 함께, 온전한 30대가 열렸다. 아직은 나이먹는게 좋다. 십대보다는 이십대 초반이, 이십대 초반보다는 이십대 후반이 더 행복했다. 남조선 나이 서른이 조금 지랄맞긴했지만 그거야 아홉수라 치면 별 거 아니니까. 이진수처럼 살자. 0 아니면 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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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9. 2. 4. 23:38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335671.html

딱 일주일 전이다. 설날 연휴 마치자마자 돌아와 경영실적보고서에 평가계획에 혁신마일리지에 기타등등 업무관련 생지랄을 쳐대다 열시 넘어 확인해보고 주먹 불끈 쥐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바로 베란다로 뛰어나가 P선배에게 전화. 

예. 선배 저에요. 매너놈. 늦은시간 죄송함다. 근데 드릴말씀이 있어서요. 뭔데요? 아. 원두분쇄기 선배 꺼라는데요? 네? 한겨레 됐어요. 드립퍼 이야기. 정말요? 네. 확정되서 머신 오는거에요? 그렇다네요. 와 완전좋다!!

다음날 매너놈의 지인 중에서 한겨레 보는 넘들에겐 모두 전화가 왔지 싶다. 그중에서도 자기도 썼는데 나가리됐다는 sb군의 전화가 가장 반가웠고. 

이제야 이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오늘 아침 쥔장놈 홈피(www.mycahier.com)에서 예견한대로, 이번주 당선작을 맞춘 기념이다. 눈에 확 들어오는 글이긴 했는데 조금 식상한 감이 좀 뒷골 땡겼다. 그래도 많이 다듬은 티가 나면서 개성적인 문장이 점수를 얻었지 싶다. 좀 더 말하자면, P선배와 함께 "이 응모글 괜찮지 않아요?"하며 같이 돌려보고 통통 튀는 문장 몇개에 고개 끄덕인 적도 있기 때문이다(그러길래 만원빵 좀 하지. 쥔장놈 ㅆㅂㄹㅁ)

이번주내로 머신 온다고 했으니 뭐. 내일이나 모레 오겠지. 주말에는 크룹스 머신으로 된장질을 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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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9. 1. 22. 09:17
지금의 애인님은 말할 것도 없고. 

나보다 정신의 키가 몇 배는 높은, 분에 넘치는 좋은 여성들을 친구로 많이 만나, 그 영향을 받아 왔다. 

애인님, 막장 중등교사 K, 예전 관계녀 P, 정말로 오래된 사이 K, 하회탈 웃음의 H, 공장 선배 P, lady R, 선인장 C누이, 엽기간호사 L, 매너놈이 아는 가장 멋진 커리어 우면S, 졸업하고 더 친해진 개김녀 K, 누구보다 넘치는 재능을 지녔던, 자매같던 두 손윗누이 P와 M, 글자 그대로 아티스트 H, 이상적인 아줌마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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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9. 1. 21. 12:51
연우가 되라는 하늘의 뜻인가보다.

p. s. 왼손 분산화음 짚을 때 유난히 거슬리던 왼손 2번 손톱을 아주 짧게 깎았더니 손톱 끝에 피망울이 맻혔다. 건반과 키보드를 짚을 때마다 아릿하게 아프다. 아픈 건 니 사정이고 나는 건반 짚고 키보드 친다. 이렇게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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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2. 21. 22:03
동갑내기 공장 동료와 얼마전 술을 마시다 든 생각이다. 나를 내가 판단하는건 참 위험한 일이다. 내가 매력적인지, 내가 일을 잘 하는지, 내가 옛날 여자들에게 잘 해줬는지, 사실상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 자신이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지도 모르겠다. 녀석의 자랑스러운 목소리와 주접 덕에 배운 사실이다. 

지랄 같은 2008년이 스러저간다. 참 길었다. 2009년, 꽤 중요한 분기점이 될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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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2. 19. 00:48
하나. 

땡길 때 지르는 거다. 이런 건. 여섯시 칠 분에 컴퓨터 끄고 나와 혜화동 정미소에 갔다. 이십 분을 기다려 삼만원짜리 표를 끊었다. 이층 맨 앞줄, 자리는 불편했다. 그리고 가로막힌 유리벽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연극이 시작된 후, 답답함을 느낄 순간조차 없었다. 



둘. 

매너놈이 바라는 이상적 인간이 바로 닥터 리빙스턴이다.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자존심 때문에 과거형으로 쓰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의지대로 '진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대체 그래서 그녀에게 무엇이 남았나. 결국 참혹한 진실 앞에, 기적을 바라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고백한다. 그래서 내게 묻는다. 매너놈이 리빙스턴보다 강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적 이성 타령을 하느냐. 



셋. 

삼십 년 쯤 시간이 흐른 뒤, 조카뻘 되는 사람들에게 빙긋 웃으며 자랑할 일이 생겼다. 윤석화가 연기하는 리빙스턴을 보았노라고. 그리고 정말 다행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애인님을 놔두고 혼자 슥-가서 보고 와서. 같이 갔더라면 지금과 같은 먹먹함을 느낄 수 없었겠지. 서늘한 바람 이는 동대문길을 걸어 집구석 돌아오며, 자칭 '조금(이는당사자 강조)'날라리 외부자 시선으로 보면 지독히 기독교스러운 P선배가 생각났다. 아마도 그녀가 보면 매너놈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 지독한 공감이 이끌려 나오겠다 싶더라. 크리스마스 카드를 쓴다면, 추신. 쪽에 몇 자 붙여야겠다. 



넷. 

죽음과 소녀. 를 들으며 집에 와서 혼자 술을 마셨다. 한 번 더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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