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人2013. 5. 25. 22:50

같이 연구를 하는 V에게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연구용역과제가 목요일 이후 전혀 진전이 없었다. 엑셀이나 SAS같은 툴을 다루는 기술적인 측면을 주로 물어보는걸 답해주고 하나에서 열까지 하는 걸 다 봐 주고 하다보니, 녀석이 그쪽으로만 집중을 했나 보다. 시간투여는 꽤 한 거 같은데 원고는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예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번호로 박아버렸다. 원고 작성 되는대로 발송하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그다음에 내가 작성한 부분을 보여주고 나름의 논리 흐름을 설명하면서. 그리고 정공법이 아닌 사이드를 치고 들어오는 논리임을 알려준다. 그래도 기본은 샤프한 녀석이라, 내가 걱정했던 부분을 그대로 짚고 들어온다. 


"지역별 도로 공급이 통행수요와 불일치한다고 보기엔 근거가 좀 빈약하지 않아요? 통행수요로 제시하시는 것이 지역내 화물운송량과 지역별 차량운행거리의 변동뿐인데, 이거 좀 이상한 거 같아요."


끄덕끄덕. 근데 어쩔 수 없는 것. 시간과 자료의 제약. 어찌 되었든 설명을 해 주고 넘어갔다. 


들어오는 질문, 특히나 테크니컬한 쪽에는 일단 (애증섞인) 짜증 한 번 버럭 내 준 다음에 말을 이어붙인다. 엑셀이나 SAS같은 통계프로그램이 대다수인데, 일단 자기가 모르면 찾을 생각 자체를 잘 안한다. 검색엔진을 돌려도 좋고, 책을 찾아보는것도 방법이며, 각종 프로그램의 도움말은 생각보다 잘 되어있다. 물어볼 때 마다 검색은 해 봤냐, 찾아는 봤냐 물어본다. 반년이 지나도 안찾는 애들은 안 찾는다. 학기초에는 나도 바빠 죽겠는데 돌아가면서 붙잡고 늘어져서, 짜증을 버럭 내기도 했다. "왜 늬덜은 찾아보지도 않고 물어보냐. 나는 뭐 다 알아서 얘기해주는줄 아냐? 늬덜 질문 받고 난 다음에 찾아보는게 절반 이상이다." 뭐 대략 이런. 그러다보니까, 요즘은 아예 검색해도 안 나온다는 걸 들고 오면, 무슨 검색엔진에서 뭘 썼는지부터 물어본다. 이거 한 다음 좀 많이 줄었다.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찾는지도 모른다면, 좋은 질문을 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p. s. 나의 옛 직장에 대해 감사하는 점.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특히 테크니컬한 측면에서는. 어떻게든 혼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검색엔진을 뒤지던지 메뉴얼을 뒤지던지, 아니면 생판 모르는 데 전화해서 물어보던지. 그나마 그곳에서 씨발씨발하면서 몸에 익힌 습관으로, 그나마 이번 학기를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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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iring pianist2009. 1. 27. 23:33
어설프게 체르니 30번의 녹음을 들은 게 화근이었다. 느린 템포에서는 그닥 큰 어려움 들이지 않고 쳐낼 수 있는 연습곡이었다. 오른손의 진행도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니었고. 문제는 전문 피아니스트가 녹음된 체르니 30 - 14번, 템포가 달라지니 전혀 다른 소리가 나는 데 있었다. 세상에. 이거 내가 쳐온 곡 맞아? 

왼손 진행이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닌지라 오른손만 좀 빠르게 하면 되겠거니 하고 속도를 좀 높였는데, 이게 그리 자연스레 될 리가 없다. 결국 레슨 받기 전까지, 빠르기도 감당 못하는 주제에 건반까지 대충 짚는 최악의 사태에 닿고 말았다. 선생님의 지적이 이를 반증한다. 

"보통은 전보다 나아지는게 정상인데말이죠."

ㅜㅜ

선생님이 오늘은 작심한듯 서늘하게 웃으시며 지적사항을 말씀하신다.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음을 많이 섞으시긴 했지만, 학생에게 그 웃음은 따뜻함이 아니라 목에 겨눈 싸늘한 칼날이다. 

"(악보 6째마디 위에 에 별표 치다 말고 연필을 건네며)자. 쓰세요 붓점. 여기 스케일 잘 안되는 부분 붓점으로 부분연습 계속 하셔야 되요. 지금 4번 치는데서 자꾸 음이 뭉개지거든요. 그건 붓점으로 또박또박 짚는 연습을 좀 안하셔서 그러니까 붓점 연습 많이 하세요. 백번!(웃음)그래. 다음시간까지 백번 쳐오세요!"

어금니 꽉 깨물었다.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에서 박중훈을 빌려 친 계백의 대사가 생각날 지경이었다. - 그래. 내 팔꿈치를 핥아주지. 농담 안하고 붓점으로 백 번 쳐 본 다음에 그래도 안되면 안되는거다. 

진짜 붓점으로 100번을 쳤다. 

...

그렇게 해도, 또박또박 짚혀지긴 하지만 MP3로 들은 전문 피아니스트의 테크닉에는 미치지 못하더라. 
얻은 게 있다. 어지간히 연습해도 오른팔이, 손목이 아프지 않다. 단련이 된 모양이다. 
하여튼 다음의 레슨 시간, 별다른 지적사항 없이 넘어갔다. 선생님도 흡족해하시고. 
더 붙은 매너놈의 사족

 - 근데 100번 쳐도 안되는건 안되더군요
 - (웃음)그걸로 밥먹고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지금 신경쓰시면 안되요. 아예 안 듣는게 속 편하실걸요?

죽어라 쳐야지 뭐. 별다른 방책 있나. 
다른 연습곡들도 레슨 받기 전 100번치기를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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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iring pianist2009. 1. 19. 23:36
(자세한 이야기는 수요일 레슨 마치면 쓰겠음)

내 붓점으로 100번 치고 만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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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iring pianist2009. 1. 15. 23:59
일단 지난 수요일 레슨 : 체르니 30 - 13, 선생님 "연습 많이 하셨네요. 더 이상 말씀드릴데가 없어요." ^_^o-

다음 14번 연습을 안했기에 하농으로 건너 뛰다. 얼마만에 스케일 레슨 받는건지 ㅜㅜ

손을 좀 풀어두긴 했는데 드문드문 끊어졌다. 그런거야 뭐 웃으며 넘어가긴 했지만 결국 IV, V, VII, I 넘어가는 마지막 화음짚기에서 조금 버벅대자 바로 이어지는 선생님 말씀 : 스케일의 으뜸음(그러니깐, 여기서는 A-flat)을 기준으로 잡고 건너뛰면 된다. 쉽게 말해, 오른손 2번으로 잡은 A-flat을 기준으로 잡고 네 옥타브 건너뛴 A-flat을 오른손 5번으로 짚으면 된다. 

아니 근데 이 중요한 기준잡는 법을 왜 이제 가르쳐 주시냐고요 ㅜㅜ 그런 방식으로 으뜸음 잡으니 한결 쉽다. 이게 어디냐. 일단 이번달 안으로 스케일 자체마감을 목표로 건반 짚어나가야겠다. 

수요일 저녁, 체르니 30-13을 조금 더 복습하다가 30-14로 넘어갔다. 처음 여덟마디 익숙해질때까지 반복했다. 
돌아와 야근을 마저 치다. 야근치는날엔 연습기 쓰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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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iring pianist2009. 1. 12. 23:34
일주일 내내 정부평가 보고서 쓴답시고 야근쳤더니 레슨/연습기도 못 썼다. 일주일간의 레슨/연습기를 오늘에 몰아 쓰다. 일주일동안 체르니 30-13 한 곡만 주구줄창 팠다. 체르니 30번의 첫번째 암초라는 세간의 평가가 틀리지 않음을 확인했으니. 

일단 선생님 지시사항부터 순서대로 

1. 6/8박자다. 보통 2박자, 4박자 단위와는 리듬 체계가 다르다. 6/8박자 강약약 중간약약의 박자감각을 살려야 리듬이 제대로 나온다. 이게 잘 안먹히면 일단 오른손을 붓점으로 연습한다. 
>>몽생종이 쓰고 이세욱 선생이 번역한 리흐테르의 음악수첩을 읽으면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보 포고렐리치가 연주한 프로코피예프에 대해 곡의 이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맹렬히 비난하는.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오늘에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2박자, 4박자 리듬에 익숙해진 매너놈이 처음에 가장 적응 못했던 게 3박자 단위로 리듬을 지켜주는 법이었다. 강약약 중간약약을 연습하고, 오른손을 붓점으로 연습하다보니 2박자 단위로 치던 멜로디와 확연히 다른 선율이 살아난다. 3박자 곡을 2박자처럼 끊어치니 선율이 안 나오는 거였다. 곡의 대한 이해가 어떤 건지 몸으로 배웠다. 

2,. 오른손 1번이 F를 계속 짚는다. 이건 최대한 소리를 죽여야 주선율이 살아난다. 
>>1번에서 붓점으로 연습하며 몸으로 배웠다. 붓점을 지키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1번으로 짚는 F의 세기를 죽일 수밖에 없다. 짧게 치니까. 이게 숙달되면 아주 자연스럽게 나머지 2-3-4-5번으로 번갈아 짚는 선율이 살아난다. 라 캄파넬라의 선율도 결국에는 이걸 좀 더 어렵게 한 것일게다. 

3. 7마디의 왼손 아르페지오 세기 그대로 갈 것. 별다른 악상기호 없다
>>괜히 혼자 흥분히자 말라는 말이다-_-;

4. 8마디의 왼손 스타카토 악센트 주지말고 디미누엔도로 가볍게 끊을 것
>>쉬어가는 음이라고 무조건 악센트 주는 게 아니다. 곡 전개상 스러지는듯 가볍게 쳐야 할 부분이다. 

5. 13 - 14마디의 오른손 첫 음 악센트 제대로 지킬 것. 특히 b플랫 짚을때 오른손을 깊숙히 뻗을 것. 
>>왼손도 b플랫 짚고 A내려갈 때 왼손 전체를 옮기는 느낌으로 움직여야 건반이 제대로 짚힌다. 

6. 16마디도 8마디와 마찬가지로 왼손 악센트 주지 말고 디미누엔도로 사라지듯 끊을 것

7. 16 ~ 17마디 건너갈 때 자연스럽게 박자 지켜 넘어갈 것

8. 17마디 오른손 A - C - G# - C - A - C 손가락 연습 빡세게 
>>짚을 때 1번을 끝까지 뻗는 느낌으로 짚어야 미스터치가 안 남

9. 30마디 왼손으로 C짚을때만 스타카토. 오른손 모두 레가토임. 왼손은 스타카토 짚고 확실히 띄기

10. 45 - 48마디, 마지막이고 악상기호도 f -> ff다. 오른손 코드 바뀔때마다 더 강하게 표현해 줘도 좋다. 전반적으로 p, pp 대단히 여리고 섬세한 곡이니 마지막에 터뜨려준다고 생각해라. 
>>가장 애먹은 부분이다. 오른손의 진행이 B플랫을 계속 짚어나가면서 오른손 코드를 한 음씩 내려감을 먼저 파악해야한다. 무한반복 연습으로 간신히 때우다. 

11. 44마디 >> 45마디 넘어갈 때 어차피 왼손에는 이음줄 없다. 손 완전히 떼서 옮긴다. 


이 곡만 일주일 내내 연습하고 레슨 네 번을 받아 마무리지었다. 꽤 애먹긴 했는데 능숙하니까 손목 돌리는게, 그리고 살짝살짝 짚어 고운 소리 만들어내는 것이 꽤 재미있다. 

그외 기타 매너놈 혼자 연습하다가 애먹은 부분

하나. 22 ~ 23마디 넘어가는 부분. 별로 어려운 진행도 아닌데 이상하게 왼손이 많이 헤맨다. 왼손 엄지가 G - b플랫을 한방에 찾아가는게 관건이다. 무한반복 연습으로 해결하다. 

둘. 44마디에서 왼손 2-3-2로 b플랫 - A - b플랫을 짚어야 하는데 이걸 자꾸 3-4-3으로 짚거나 A-G-A로 짚으니 다음 진행이 계속 꼬인다. 43마디와 이어서 무한반복으로 해결. 

체르니 번호 하나에 이렇게 헤멘 적도 없었다. 그래도 일단 마무리지으니 손목 스냅을 주어가며 오른손 찍는 게 즐겁다. 치면 칠 수록 여리게 짚을 때 나오는 소리가 황홀해진다. 무한반복연습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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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iring pianist2008. 12. 9. 22:24
매너놈이 피아노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한 게 올해 7월이다. 그때부터 어떻게 소문이 퍼진 거 절반, 같이 하자고 꼬신 거 절반 해서 매너놈이 끌어들인 공장 직원이 7명이다(모두 여성동지라나~). 이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피아노 동호회라도 공장 안에 만들어야 하는거 아니냐, 매너놈씨 이렇게 사람들 끌고 왔으니 회비 레슨비 한 달 면제받아야 되는거 아니냐 등등등 농담따먹기를 나누곤 한다.

그러던 와중 농담삼아 선생님께 농담을 던진 적이 있다.

"공장 사람들 많이 데려왔는데 저 레슨비 할인 안되나요?(멋적은듯 웃음)"
"(푸훗 웃으시면서)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에이, 밥을 사면 제가 사야죠."
"꼭 그런 게 아닌데. 이번에 성인반도 많이 늘어서 디지털피아노실 없애고, 진짜 피아노 더 들여올 거에요."
"아, 정말요?"
"네. 아마 담달 중에 그리 될 거 같네요."

지난 주 금요일은 매너놈네 공장 작업반에서 가장 큰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레슨 째고 어제 저녁 건너갔는데 와, 이빨 빠지고 건반 잘 안 올라오는 고물 피아노들이 모두 교체된 건 둘째치고, 새 피아노 열 대가 새로 들어온거다. 나무 니스 냄새도 아직 덜 빠진 새 피아노 열 대가 칸칸히 놓여있는 모습에 매너놈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기존 연습실의 중고 피아노가 업라이트 최고 모델인 131cm짜리였음에 비해 121cm짜리라는건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새 피아노인데 가릴소냐. 어제 저녁 이 피아노 저 피아노 두들겨보며 어느 녀석이 좋은 소리를 내나 돌아다녔다. 처음엔 건반이 가장 묵직한 피아노를 잡고 길들이려 했지만 한 녀석이 건반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가장 덜 나고 다른 녀석들에 비해 워낙에 좋은 소리가 나서 그녀석을 길들이기로 했다. 그래봤자 지난주까지 매너놈이 쓰던 피아노보다는 훨씬 건반이 무겁긴 하다.

연말 공장업무 성수기가 시작되는 즈음이라 매너놈의 연습시간은 점심시간 한시간 이십분, 저녁시간 한시간 정도다. 점심은 두유나 김밥으로 때우고, 저녁은 김치볶음밥이나 제육덮밥을 다녀와서 일하며 삼십분동안 씹어먹거나 굶는다. 그걸론 양이 안 차, 오늘 퇴근하자마자 대강 저녁을 때우고 세시간동안 새 피아노를 길들이다 왔다. 아직 덜 길들여져서 낮은음자리 쪽의 건반을 짚으면 먹먹한 소리가 나고 터치도 뻑뻑하기 그지없다. 이게 정말 마약같은 재미가 있는 건, 계속 치면 칠수록 길들여지는 소리가 점점 저음쪽으로 내려가는게 느껴지는거다. 무언가에 홀린 듯, 체르니 30번 중반의 테크닉이 허용하는 거의 모든 곡을 총동원하여 피아노를 길들이다 왔다. 그렇게 세시간을 보내고 나니 손가락은 물론이고 팔꿈치 아래쪽 관절이 모두 먹먹하다. 주먹을 꽉 쥐는 게 힘들 정도다.

여러모로 아주 지랄같은 일 많던 2008년이었지만, 피아노를 제대로 시작했다는 것 한가지만으로도, 다른 모든 지랄같은일을 잊을 수 있지 싶다. 며칠 안 남은 올해, 할 데 까지 해 볼거다. 그리고 연말쯤 시간 잡아서 성인반 사람들하고 저녁이나 한 끼 먹으러 가야지. 꼼꼼한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도 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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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0. 5. 21:19
요즘 피아노 앞에 앉아 모차르트의 K. 265를 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저질체력의 젊은이가 비전을 하나 얻어 그 책에 나온 도해와 방법대로 죽어라 연습한다. 그렇게 죽어라 하다보니 그 책의 모든 무공을 그림대로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비전에는 여기 소개된 무술대로 칼을 내리치면 바위는 물론 쇳덩이도 두부처럼 자를 수 있고,  못 물리치는 적이 없다고 했다. 의기양양한 이 막장체력의 젊은이, 집구석 가보로 내려오던 보검을 움켜쥐고 그 도해대로 힘차게 집구석 앞 마당의 바위에 초식대로 내리치나 쩡. 하는 소리 뿐, 바위에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대체 왜그럴까? 답은 아마도 이 젊은이의 '저질체력'에 있을 것이다. 운공이고 뭐고간에, 제대로 칼을 쥐고 내리칠 기본 체력이 없는데 거기에 잔재주 더해 봐야 뭐할 것인가.

레슨 시작한 지 세 달이 넘었다. 이제 K. 265의 모든 변주는 언제 어떻게 손을 뻗어 짚는지 머리속에 다 들어있다. 손가락도 얼추 따라간다. 문제는 이를 정확히 수행해 낼 '기본'이 내 몸에 배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변주 2번 마지막 부분에서 1 ~ 3도를 차례로 왔다갔다하며 왼손이 한 음계를 짚어내는 부분, 손은 얼추 따라가지만 막힘없이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한다. 바로 이게 문제다.

그렇다고 이 부분을 죽어라 반복연습하면 해결될 문제냐. 아주 시간이 많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다른 데 있다. 음계 하나를 무리없이 짚을 수 있을 정도의 왼손 손놀림을 먼저 연습하고, 그 다음에 이 곡을 연습하는게 거다. 가장 효율적으로 그러한 손놀림을 몸에 배게 하는 건, 매너놈이 아는 한 극악의 하농 노가다 뿐이다. ㅜㅜ

그런 전차로, 오늘은 하루 종일 하농의 스케일만 짚었다. 손이 제대로 풀린다고 할까. 두어 시간을 죽어라 하농 짚다가 K. 265나 다른 곡을 짚어 보면 확연히 손이 잘 돌아간다. 반세기동안 꾸준히 피아노 연습 교재로 팔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작은 계획을 하나 잡았다. 10월 안의 목표로. 하루에 무조건 하농 스케일 한 조씩 떼는 걸로.  이걸 마치고 나면 한 단계 더 올라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하는 거다.


Posted by mannerist
aspiring pianist2008. 9. 5. 12:54

점심시간을 쪼개서 피아노 레슨을 받는 매너놈은 월/수/금에는 레슨을 받고, 화/목에는 걍 연습을 한다. 그리고 야근과 저녁 약속이 없다면 "아무 생각없이(이게 제일 중요하다. 생각이 많아지면 몸을 못 굴리다)"연습실로 가서 두어 시간 정도 연습하다 집에 간다. 그리고, 땡기면 집구석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는다.

지난주 휴가 관계로 연습을 꽤 건너뛰어, 월요일 레슨때 '지난번 지적한 것 중 고쳐진게 별로 없다'는 단순명쾌한 갈굼을 받은 이후 적당히 의욕이 넘쳐 소나티네 9번"만"이틀 내내 두들겼다. 낙소스 뮤직 라이브러리에 접속해서 연주도 들어보고. 물론 그 스피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알레그로 모데라토 정도의 빠르기까지는 첫 소절이 따라잡았다. 문제는, 공장 일과 관련해 정신이 산란하여 더 진도 나갈 마음이 안 났던거. 그냥 첫 소절만 주구줄창 이틀동안 두들겼다.

그러고 나서 오늘 레슨. 치고 나서 "음. 잘 하셨네요."소리 듣는게 얼마만인지. 물론 세세한 부분, 아직까지 왼손 여린음 처리가 안되는거, 성의없이 툭툭 던지는 것 처럼 건반 짚지 말라는 지적은 여전하지만, 어디 그게 하루아침에 고쳐지나. 몸이 안따라간다고오~ 그나마 '왼손' 찍어서 이야기해주신 데 감사해야하나. 오른손은 좀 나아졌단 말이 되니까.

문제는 그 다음, 예상치않게 지적사항이 하나도 없자. 당연하다는 듯 다음장을 넘기신다. 켁. 연습량 거기는 제로에 가깝단 말이죠. 내 낭패어린 표정을 보던 선생님, 피식 웃으시면서 잠깐의 잡담 모드. 낙소스 뮤직 라이브러리에서 들었던 곡에서 일부 스타카토 처리가 분산화음으로 변경되어있는거, 툭툭 던지듯 건반 짚는다는 나쁜 자세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반대로 선생님의 손 모양도 보고. 거의 손목을 들지 않고 손끝으로만 소리를 낸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다.

공장 돌아오는길에 시계를 확인해보니, 레슨 받은 시간이 10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허투루 가르친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더 배우고 뽑아낼 수 있는데, 진도 나갈 수 있는 부분까지 내가 연습해오지 않아 더 배울 수 있는 부분을 못 배웠던 것 뿐이다. 하루 최소 연습량을 정해놓고 무조건 그걸 채우고 자는 걸 시도해볼까? 좋다. 일단 평일 세시간, 주말 다섯시간부터 시작해보기로 한다. 크로노그래프가 필요하지 싶은데 그건 뭐. 줄 끊어진 전자시계로 처리하면 되겠지.

손목의 통증이 끝났나 싶더니 한시간 이상 건반을 짚으면 이제 서서히 손가락 마디가 저려온다. 이 통증도 가시고 나면, 또 한 단계 올라가겠지. 그냥 통증에 무심해지기로 한 결심, 여적지 유효하다.

Posted by mannerist
aspiring pianist2008. 9. 3. 23:57
지난달부터 꽤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 생겼다. 왼손 손목, 그러니까 새끼손가락과 약지를 움직이는, 손목 아래쪽에 자리잡힌 근육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땡기기 시작하더니 증세가 극단으로 치달은 8월 말에는 왼손 손목을 뒤로 재끼기만 하면 진짜 손목이 끊어질것같은 통증이 느껴져 60도 이상 뒤로 재끼질 못했다. 무리하게 하농과 K265의 한 옥타브짜리 화음을 두들겨 댄 탓인가 싶어 연습을 끊어 보기도, 파스를 붙여 보기도 했건만 별반 나이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자세는 좋은 편이라고 했는데, 손목과 팔을 움직이는게 좀 덜 해서, 결국 자세가 나빠진건가. 계속 이래서 진도 나가겠나. 그런데 이걸 얘기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다 물어본 게 지난주 휴가 가기 전, "절대 복종"을 모토로 삼고 있는 제자 매너놈은 레슨 시간에 "저기 여쭤볼 게 있는데요"함서 말을 꺼낸다.

"그런데요, 여기 - 왼쪽 손목 아래를 가리키며 - 가 계속 아파서 그러는데요..."
"(빙긋 웃으며, 그러나 무덤덤하게)네. 그거 원래 그래요."
"네?"
"당연한거에요."
"(망설이다)오른손은 또 안그러거든요. 혹시 제가 자세가 나빠서 그런건가 해서요."
"음. 그렇진 않아요. 오른손은 괜찮으시다면서요."
"네. 그러니까 이상해서요."
"지금 왼손, 특히 손목하고 팔이 오른손만큼 안돌아가서 그래요. 손목이랑 팔 전체를 좀 더 쓰시고요."
"네..."

그리고. 그날 대화의 포인트.

"안아플때까지 연습하셔야해요."

운동선수처럼 운동으로 뭉친 근육은 운동으로 풀란 말인가... OTL...

그날 이후 왼쪽 손목이 땡기건 아프건 그건 니네 사정이라 생각하고 연습량을 평소의 두 배 정도로 늘렸다. 하농 스케일 연습을 한두시간씩 하고 난 다음에야 연습곡과 K265를 쳐 나갔다. 아픈것도, 강도가 계속 똑같다보니 덤덤해졌다. 왜 중학교때 하루에도 수십대씩 타작당하다보면 엎드려뻗쳐하고 야구빠따로 서너 대 맞는 것 정도는 가을바람에 이는 낙엽이 뒤통수 치는 것 정도로 심드렁해지는 일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십오년 전, 만성이 되다 보니 엎드려뻗친 상태에서 별 생각없이 선생의 구두코를 바라보며 "저 XX 오늘 구두는 닦고 왔네" 그러고 피식피식 웃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통증에 무덤덤해졌다는 말이다.

그러고 오늘, 어김없이 점심시간에, 그리고 퇴근후에 하농과 소나티네를 연습하다가 무심코 기지개를 켜는데, 왼쪽 손목의 통증이 싹 가셨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손목을 과도하게 뒤로 재껴보고 꺾어 보는데 가뿐하다. 혹시나싶어 등 뒤로 손바닥을 마주쳐 봤는데도 두세 달 전처럼 가뿐하게 접힌다. 뭐야. 이거. 다 나았잖아.

조금 더 생각해보니, 통증을 의식하게 되지 않은 시기가 K265를 한번에 이어서 주욱 칠 수 있게 된 시기랑 대강 일치한다. 그런거랑 맞물려 생각하니, 겨우 통증 하나가 없어졌을 뿐인데 뭔가 한 걸음 더 나간 거 같다.

앞으로 팔 이곳 저곳이 더 쑤실 거다. 오른손 2,3 번과 4, 5번 소리는 여전히 확연하게 구분될 정도로 다르고, 5번은 심심할때마다 두번째 마다기 꺾이지 않아 부담스러운 자세로 불안정한 소리를 낸다. 왼손은 모데라토 이상의 템포에서 16분음표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럴때마다 또 극심한 통증에 한번씩 시달리겠지.

엄살 떨지 말고 요령 떨지 말자. 노가다는, 양적 축적은 위대하다. 그냥 무심히 밀고나가는게 최고다. 매너놈이 무슨 레온 플라이셔도 아니고, 직장에 반나절을 매여 사는 주제에 무리한 연습으로 오른팔 마비를 겪을 공산은 신경 꺼도 될게다. 그러니 고통이고 아픔이고 핑계대지말고 연습, 연습, 연습이다.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