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字錄'에 해당되는 글 65건

  1. 2008.12.13 서른살의 몸살
  2. 2008.11.24 사무실에서.
  3. 2008.11.19 만취, 한양대 응급실, 구급차 2
  4. 2008.11.16 3건의 결혼식
  5. 2008.11.11 바흐 평균율 전주곡 첫 곡
  6. 2008.11.02 YTN의 팔뚝질에 별 관심 없는 이유 2
  7. 2008.11.01 긴장이 풀린 건지 없는 건지.
  8. 2008.10.27 그랜드 피아노
  9. 2008.10.17 자기제어
  10. 2008.10.05 내공
打字錄2008. 12. 13. 18:20
목요일 점심 먹고 난 이후부터 몸이 이상했다. 오한이 슬슬 오는 것이 낌새가 안 좋아 평소에 입지도 않던 공장 작업복까지 껴입고 연신 따뜻한 물과 모과차를 들이킨것도 모자라 옆방에서 아스피린까지 빌려 먹었다. 그럼에도 몸의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몸 안좋다는 핑계를 대고 피아노 저녁연습을 가지 말까 생각도 해 봤지만 글자 그대로 핑계가 될 거 같았다. "30분만 다녀오겠습니다" 말하고 악보 들고 연습을 갔다. 정확히 시켜놓은 밥 돌아올 타이밍에 들어가 육개장을 떴다. 국물은 따뜻하고 매콤했지만, 몸의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일곱시 반을 넘기니 오한이 도를 넘었다. 그판국에도 공장 작업반에는 아무도 퇴근할 생각을 안 한다. 매너놈에게 시급히 걸려 있던 일은 없었지만, "뭐 시킬 일 생길 지 모르니 대기하라"는 작업반장의 말에 몸 뜰 생각을 못했다. 이럴 바에 약기운이나 빌어보자 하고 새로 받은 사수에게 약국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던지고 몸을 굴렸다. 생강쌍화탕 한 병과 몸살감기약 한번 먹을만큼을 받아들고 앞건물 방송국에 들려 매너놈과 비슷한 신세의 L에게 들려 농담따먹기를 빙자한 자학을 좀 하다 건너왔다. 그러고나니 매너놈 엄살이 좀 심했던가. 하느님이 보우하사 퇴거 명령이 떨어졌다. 일단은 지화자.

올 초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매너놈은 몸살이 나면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차 한대 지나갈때마다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간신히 mp3로 귀 틀어막고 걸음 하나씩 옮기는데 내 발자국 소리에 내 몸이 흔들거린다. 이런 젠장을 외치며 간신히 집에 왔다. 살갖에 닿는 면티부터 맨 위의 오리털 조끼까지 다섯 겹의 옷을 겹쳐 입고 세 겹의 이불을 덮어쓰고 전기장판 위에 드러누웠는데 빌어먹을, 땀은 커녕 온몸이 덜덜 떨린다. 손발이 얼음장같았다. 당췌 이게 현대물리학으로 설명가능한 현상인가 의심이 들었는데 뇌입원 지식인을 찾아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몸살 기운이 가시기를 빌며, 간신히 눈을 붙였다.

다음날 아침. 눈 떠서 몸살기운이 대강 가셨나 싶었는데 왠걸,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몸마디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이런 개같은 경우가. 를 외치다 결국에는 공장에 전화를 걸었다. 연차 하루 써주세요.

이틀을 끙끙 앓다 마지막 남은 보너스로 깨질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타이레놀 네 알과 지독한 커피 한 잔, 그리고 반신욕 한시간으로 간신히 잠재운 지 채 한시간이 지나지 않는다. 가끔 매너놈에게 놀리듯 던지는 P선배의 농담대로, 이년 더 살아보라는 말이 뼈마디에 아려왔다. 병원 한 번 간 일 없이 보낸 지난 영광의 10년, 20대는 이제 스러져버린것 같다. 아플 이유가 없는데 난데없이 닥친 몸살에 온전히 이틀 날려먹고, 타이레놀 절반만 쪼개 먹어도 두통과 담 쌓을 수 있던 시절은 지나버렸다. 예전같으면 치사량에 다름없을 타이레놀 네 알을 하루에 쏟아붓질 않나, 이틀동안 잠에 취해 서있을동안 허리가 부러질듯한 고통에 시달리질 않나. 건강체질이란 말이 왜 허무한지, 사전에서 왜 지워져야 하는지 실감나는 중이다.

어쨌든, 토요일 밤과 온전한 휴일 하루가 남아있다. 앞으로 어지간히 골아플 1년의 서두에 서 있을 내게, '판의 틀'을 짜는 가장 중요한 시기다. 내 뜻과는 다르게 사수를 잃고 독고다이가 된 지금, 공장 전체의 성과관리 체계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 언제나 매너놈에겐 그랬다. 이왕 망한거 완전히 망해보자. 라 결심할 때 되려 좋은 일이 터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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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1. 24. 23:22
하나. 간만에 뻑뻑하게 일했다. 오전 내내 내부고객만족도 조사 뒤치닥거리에 매달렸다. 퇴직하면 자동으로 인사 DB에서 삭제되는 문제가 있던 걸 개선해서 사내 인사시스템과의 연계 체계를 이중으로 만들어놨더니 이제 무심결에 물리면 퇴직자가 재직자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현재 인사DB와 대조해서 일일히 노가다를 쳤다. 뒷골 땡겨서 각 담당자들에게 이중 확인시킨 명단도 나름 제 몫을 했다. 무사히 조사가 끝나기만 바란다.

둘. 여전히 건반 앞에 선 매너놈의 손은 둔하다. 이정도면 됐거니 싶어 몇 번 연습하지 않은 소나티네 5번은 어김없이 선생님 앞에서 헤멘다. "지난시간과 그다지 달라진 게 없네요." 떱떠름한 스승의 표정 옆에 앉은 매너놈의 속은 쓰라리다. 똑같은게 당연하다. 몇 번 안 쳤으니까. 당연히 진도 뺄 거라 생각해서 엄한 다음 체르니 곡을 연습했으니까. 옆에 누가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준까지 연습해야 한다. 한두 군데 버벅대면 다 된게 아니다. 옆에 누가 앉아있을 때 그 열 배 정도 버벅댄다고 생각해야 한다. 간단히 생각하자. 1 * 10 = 10, 0 * 10 = 0. 연습에서의 미스터치 한 번은 실황에서 열 번이다. 한 번도 미스터치 없을때까지 연습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 노부코 이마이 여사의 공연을 지난 주 목요일에 다녀왔다. 모든 레파토리에서 귀를 뗄 수 없었던 올 봄, 서울 스프링 실내악 축제때 프라작 콰르텟 공연의 전율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매너놈이 처음 접한 노부코 이마이 여사의 뜨거운 소리는, 큰맘 먹고 배째고 낸 하루 휴가의 가치를 뛰어넘기 충분했다. 첫 곡 샤콘느부터 다른 세 대의 비올라 -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던, 그리고 안정적이었던 - 와 확연히 다른 소리를 냈다. 소리의 농도와 세기가 비교할 수 없었다. 언젠가 비올라를 연주하는 사람에게 직접 들었던 "노부코 이마이 - 확~~ 타오릅니다"가 무슨 뜻인지 절감했다. 헨델의 울게 하소서 변주도 더할 나위없이 좋았다. 똑같은 선율을 옥타브와 코드, 주법을 바꾸어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색깔을 냈다. 피치카토로 마무리하고 활을 허공에 그었을 때, 아쉽기 그지없었다.

넷. 그 여파 때문이다. 주말 내내 직장인 오케스트라를, 그리고 비올라를, 비올라 강습을 기웃거린 건. 뒷머리 벅벅 긁으며 다시 되뇌인다. 제길슨. 피아노부터다. 적어도, 골트베르크 변주곡 전곡 잡기 전까지는 다른 악기 기웃거리지 않으리라.

다섯. freemind로 보고서 목차를 정리했다. 매너놈이 오늘 만든 목차는 두 개다. 전년도 평가보고서의 목차, 그리고 올해 평가보고서가 들어가야할 체계를 적은 목차. 그리고 오늘 매너놈이 만든 표에는 두 개의 column이 있다. used items, 그리고 new items. used items는 평가체계의 골격이 되는 부분이다. new items는 개선사항이다. 기분 좋게도, 비중이 거의 50 : 50 이다. 이 각각의 항목에 대비되는 녀석들을 이제 올해 목차 체계에 짜 넣은다음 모든 자료를 때려부으면 마무리된다. 이번주 내로 끝내야 다음주의 쌩노가다가 조금은 여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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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1. 19. 01:42
공장에서 열네시간을 보냈다. 돌아와서 긴 하루를 두시간의 악몽으로 닫았다. 욕설과 함께 안방 문이 닫혔고, 난생 처음 119 구급차를 타 봤다. 끊임없이 괜찮아. 괜찮아. 하나 둘 하나 둘. 천천히 숨을 쉬어. 같은 말을 수십번씩 반복했다. 응급실의 허술한 의자에 앉고 나서야 핸드폰 이외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는걸 알았다. 다행히 보이는대로 집어나온 점퍼 주머니에 카드가 한 장 있었다. 콜택시에서 카드결재가 되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일도 살다보면 있다.

매너놈이 지닌 힘과 권력에 대한 혐오, 가끔 과도하다싶을 정도의 여성성의 근원을 오늘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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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1. 16. 23:34
학부 동기 S와 P, 그리고 사무실 동료 A의 결혼식이 한 주에 다 몰려 있었다.

S의 결혼식은, 비가 흩뿌리는 날씨만큼이나 서늘했다. 처음엔 그랬다는 말이다. 30분 전쯤 도착한 결혼식장에는 잔치집다운 부산함이 없었다. 녀석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잠시 기다리니 학부 선배이자 공장 선배인 H가 온다. "아니 사람들이 왜이렇게 없데. 원래 이런 날엔 아버지 친구들이 자리 많이 잡는 법인데. 역시 좀 그렇네." 그제서야 매너놈은 서늘한 식장 분위기를 납득했다.

그런 판국에 학부 동기들, 선배들은 시간이 다 되어도 오질 않았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30분 전, 세 학번 위 윗 선배인 Y의 결혼식이 지근거리에 있기 때문이었을거다. 라고 H와 매너놈은 합리화했다. 그게 맞아떨어졌는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겠다. 그 순간, 못본지 5년 된 O교수 등장. 오늘의 주례 선생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이런 젠장, '관례'대로 교수님을 수행해야 할 사람은, 기껏해야 H와 매너놈 뿐이었다. 결국 매너놈은 O를 모시고 주례가 받아야 할 서비스를 충실히 수행했다.

조금 썰렁했던거 말고는, 그래서 어여 밖에 있는 사람들 들어오라는 방송이 몇 통 울려퍼진것 말고는, 그저 그런 결혼식이었다. 그와중에 만난 반가운 이도 있었다. 애인님의 절친한 친구, 원주에서 서식하는 K선배가 유모차를 끌고 온 거다. 느즈막히 도착한 N선배 -지난주 매너놈이 축가 연주해준, 바로 그 결혼식의 신랑이다 - 가 눈치없이 묻고 따진다. "애가 5개월인데 결혼은 작년 11월... 그게..." 그순간 날아드는 K의 강펀치. "나 어디가서 물어보면 9월에 결혼했다고 하라니깐!!" 빙긋 웃으면서 매너놈이 덧붙인다. "그러지 말고, 가을에 결혼했다고 하시죠." "그래. 그거 좋다."

갈비탕이 나왔다. 간이 조금 심하게 들은 찬은, 그래도 먹을만했다. 밥이 늦게 나와 국을 절반쯤 비운 다음에야 흰 쌀밥을 국에 말았다.



공장 동료 A의 결혼식. 공장에서 나의 폭언과 망발을 가장 많이 받은 그녀다. 앞건물 K의 말을 빌리자면, 공단 최고의 미녀 A는 매너놈이 본 신부 중에서도 꽤나 아름다운 축에 속했다. 궁금한 건, 팔뚝살을 도대체 어떻게 감췄을까 정도? 그것 빼면 화장술의 발전에 경악할 정도로, A는 아름다운 신부였다. 그런 아리따운 A옆에 다가가 부주 삥땅을 어디다 쳐야 하느냐는 막장스런 질문을 하는 매너놈에게, A는 빙긋 웃으면서 동생을 가리켰다. 적당한 삥땅을 그녀에게 안겨줬다.

여적 삼십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핸드폰 문자를 확인해보니 앞방의 L과장님이다. 올라온다고 하시기에 기다리면서, 교회 들렸다 온다고 한 P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차 대고 있다는 그녀에게, L이 올라오고 있으니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P선배는 들어가서 뒷자리 잡아놓으라는 말을 붙였다.

칼질을 하느라 제대로 결혼식을 보진 못했다. 빔프로젝터로 뿌려지는 화면이 그리 선명하지 않은 탓이 크다. 신랑신부에게 치는 부분조명이 너무 센 나머지 하얀 드레스 입은 신부가 제대로 화면에 잡히지 않았다(그걸 가리켜 P는 "신부 어디갔죠?"라고 물었고, 매너놈은 고기를 씹으며 화면을 돌아보다 신랑 옆자리의 하얀 덩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신랑 옆에 하얀 거 아니에요?" "아 맞다. 저 하얀 거").



L의 차를 타고 이번주의 마지막 결혼식장으로 갔다. P의 결혼식이다. 칵테일 재료가 많이 나와있길래 즐겁게 이것저것 만들어 먹었다. 블랙 러시안을 만들기도 했고, 민트 엑기스를 토닉워터에 희석시키고 레몬을 얹어 즐기기도 했다. 아니나다를까. 꽤나 액티브한 선배 S의 갈굼을 받았다.

조금 어눌한 몸짓과 손짓을 보이는 P는,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눈에 박히는 건. 신부의 눈물자욱이었다. 그때서야 떠올렸다. 어제와 오늘 본 세 명의 신부 모두, 밝은 표정이 아니었음을. 그 반대로, 신랑 셋은 모두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도록 웃고 있었음을. 그 극명한 대비를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키지 않은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간던 목요일 밤, 애인이 전화로 물었다. 매너놈씨, 우리 결혼하면 집 어떻게 할 꺼야? 정신을 가다듬고 답했다. "전세 들어갈 집 구해봐야지. 모아둔 돈도..." 3초간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정적 때문에 술이 깬 건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정적에 대해, 믿을만한 여성동지 세 명에게 자문을 구했다. 세 명이 세 가지 이야기를 했다. 세 가지 모두 정답도, 오답도 아닐게다. 그 사이 어디엔가, 세 가지 이야기가 각기 흩어져 있을 거다. 그녀의 정적에 해답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안다. 내가 쓸 수 없는 답이라는 게 문제라서그렇지. 그녀의 정적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미소로 바꾸려면, 매너놈은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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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1. 11. 07:21
테벤 타이머를 이용한 라디오 알람을 맞춰놓고 잤다.
침대 옆의 라디오는 언제나 KBS 1FM이 고정이다.
여섯시를 조금 넘어 자동으로 라디오가 켜졌다.
바흐 평균율 전주곡 첫 곡이 흘러나왔다.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끝이다.
매너놈의 늦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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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1. 2. 23:11
이런 상종못할 넘들이 여적 있는 한, 그제나 지금이나, YTN은 매너놈에게 상종 못할 것들이다.



넋두리_먼저 꿇어라. 그리고 용서를 빌어라. 그 다음에 팔뚝질을 같이 하등가.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08. 11. 1. 22:17
오늘 새벽 한시부터 열다섯시간을 잤다. 내리 잔 건 아니다. 두 시 부터 열시까지, 그리고 다시 일어나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다시 세 시간을 잤고, 점심을 먹을까 하다 우유 한 잔 먹고 기어이 해가 진 다음에야 일어났다. 그러고 엄니가 해준 고등어조림을 씹어먹으면서 생각을 해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야 정신이 좀 돌아와 생각을 해 보니 기가 막힌다. 지난 이주가 유난히도 강력한 긴장의 연속이긴 했다. 생전 처음으로 공장에서 사수가 떨어져나가 '독고다이'가 된 탓이 가장 크다. 명목상의 사수가 있긴 당신도 자기앞가림 하는 데 여념없는 차장님이 제대로 신경을 써 주길 기대하는게 과하다.

그런 판국에. 그대로 하는 일만 치는 게 성미에 안 맞는 탓이 절반, 이왕 엎어진 판국에 내맘대로 해 보자는 아집이 절반 합쳐저 부진부서 성과관리 프로그램 실사라는, 한 번도 해본적 없는 일을 짜내어 결재 마치고 다음주 출장 올려 제주도 비행기 표까지 끊어놓은게 그저께. 그것만 했나. 영문도 모를 국정감사에 투입되어 정상도 아닌 몸상태에 - 머리 빵꾸난 관계로 열흘동안 머리도 못감았지, 그판국에 몸살 들어 끙끙 앓았지 - 여의도 텔레토비 동산에서 뺑이치며 그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나으리'들의 작태를 지근거리에서 목격하고. 그나마 여진이 내 쪽에 닿을까 노심초사하다 경계경보 해제된 게 어제였다. 어제만 해도 간만에 맞는 여유있는 주말 어이 보낼까 싱긋거렸는데 왠걸, 막상 토요일 아침 눈을 뜨니 손하나 까딱 할 수 없을 정도로 넉다운되어버렸다. 열다섯 시간을 퍼질러 잔 지금도, 온 몸에 기운이 어딘가로 빠져나간듯 집중하기 힘들다.

피아노. 올해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 한 일 하나만 꼽으라면 공장 근처 복지회관에서 피아노 시작한 일일게다. 이나마도 지난주 '목적달성 - 결혼식 축하연주'후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 이럴 때일수록 노가다 하농을 반복해서 풀어야 된다는거 알지만, 막상 피아노 앞에 앉을 시간을 쪼개기 힘드니 여의치 않았다. 일단 앞에 앉기만 하면 두세시간 보내는건 일도 아닌거 알면서도.

내일은 애인님의 임용고시 1차일. 어찌 되든간에, 다섯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전화로 깨워주고, 나도 그에 맞게 움직여야겠지. 점심 뭘 먹고싶어할까? 조금은 푸석할, 하지만 입가 깊게 번진 당신의 웃음이 그립다.

오늘은 밤을 새야겠다. 할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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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0. 27. 00:38
매너놈이 소개팅 주선해서 결혼까지 간 커플, ㄴ선배와 ㅇ누이의 결혼식이 오늘이었다. 옷한벌 얻어입은 거, 매너놈으로 인해 시작된 커플이기에 매너놈이 마무리 해주겠다는 어이없는 다짐, 그리고 계기를 만들어 연주실력을 수직상승시켜보겠다는 욕심까지 섞여서 시작한 축하연주가 낀 결혼식. 결과는...

그랜드 피아노 건반이 그렇게 생겨먹은건지 몰랐다. 아주 처참했다.

"기본에 충실하세요."

그렇게 되야 하건만, 내 성질머리는 그랜드 피아노 중고 최저가와 방음장치를 뒤지고 있었다.
매너놈 꿈의 피아노 변경. 야마하 u-3에서 그랜드라면 듣보잡이라도 상관없다.

덧붙여_썩을X. 인사하면 아는척이라도 할 것이지. 인사나 받으면 말이나 다시 털까 했더니. 그나저나. 그 딱 개독 광신도처럼 생긴 팀장놈은 뭐하러 온거야? 하긴. 실력도 쥐뿔 없는 주제에 지보다 잘난 사람 씹는데 정신나간 "선배"란 작자 상판 본 재수없는 일도 있었군. 여러모로 기억에 남을 결혼식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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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0. 17. 18:43
이번주 화요일 저녁이었다.어이없는 공장일로 인해 적잖게 속이 뒤틀린 상태였다. 그상황에서 작업반장하고 같이 밥 먹는게 무슨 맛이 있겠나. 어디 끌려가는 뭐 심정으로 공장 앞 횡단보도를 걸어가는데, C선배와 J선배를 만났다. 그나마 사람같은 사람들 축에 드는 사람들이다. 일부러 오버해서 싱긋 웃으며 같이 횡단보도 건너며 시덥잖은 농담을 건냈다. 그러고 여기서 문제 발생. 적잖은 흥분으로 인해 속이 적잖게 뒤틀린 상태여서였을까. 괜히 오버한다고 지하철 타러 가는 두 선배가 걸어가는쪽을 바라보는 한편에, 매너놈은 횡단보도 쪽으로 걸어가며, 그쪽으로 머리 숙여 안녕히 가세요 하고 꾸벅고개를 숙였다. 그순간 쾅.

눈앞에 잠시 번쩍하고 무조건반사적으로 머리를 손으로 감싸쥐었다. 끈적한 액체가 손가락 사이로 흐른다. 찝찝한 핏물 사이로 상처를 만저보니 손가락 한 치만큼이 벌어졌다. 그 틈사이로 피는 흐르고 이마에 닿고 콧날에 떨어진다. 내 옆에 있던 공장 5층의 선배 둘이 오더니 손수건으로 머리를 틀어막으라 하며 약국으로 같이 걸어갔다.

대강 소독 치고 피가 멎었길래 다시 작업반장과 사수를 만나기로 한 횟집 앞을 서성였다. 잠시 후 사수가 도착했다. 잠시 작업반장 뒷담화를 나누던 사수는 그제야 매너놈이 감싸쥐고 있는 머리 꼭대기에 눈이 갔나보다. 너 왜그래? 인사하다 신호등 컨트롤 박스 모서리에 부딪쳤는데 피가 좀 남다. 괜찮겠죠 뭐. 야. 그거 꼬매야 되는거 아니냐? 암씨랑 않슴다. 뭐 소주 한 잔 부으면 소독 되겠고. 지랄 말고 이 병원 있네. 괜찮다니까요. 야. 잔소리 말고 가자. 결국 이럴 때는 져야 하나보다. 이층을 올라가니, 검정색 옷을 입고 있는 의사가 상처 좀 보잔다. 찢어졌네요. 끄매셔야겠네. 저기 길건너 무슨무슨 병원 응급실 가서 끄매세요. 소독약을 끼얹어 준, 대여섯 살 많아보이는 의사 누님은, 카운터 앞에서 서성이는 매너놈과 간호사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그냥 가시라고 해.

호들갑떠는 사수와 작업반장을 뒤로 하고 근처 중형 병원으로 갔다. 잠시 기다리다 당직 의사를 만났다. 어쩌다 이러셨어요? 회사 선배가 뵈길래 인사를 했는데, 신호기 콘트롤 박스에 머리를 부딪쳐서. 근처 의원에 가 보니 꼬매야한다고 하더라고요. 가만있자. 두 바늘 정도 꼬매면 되겠네요. 엑스레이 찍으란 말은 안하던가요? 네. 이정도면뭐. 별 거 아니니까... 저기 누워보세요. 요즘에는 간단한 건 바느질 안 하고 호지키스 같은 걸 써요. 이건 뭐 마취 해도 아픈 거 똑같으니까 그대로 할께요. 조금 따끔합니다. 아마도 스테이플러를 머리거죽 위에 찍으면 그 느낌일 것이다. 이십 장의 A4지를 겹쳐서 스테이플러를 찍을 때 나는 우득 하는 소리와 아릿한 통증이 심드렁하게 전해졌다. 그렇게 두 번. 됐습니다. 가시고 이틀마다 오셔서 소독 받으세요. 그리고 당분간 머리 감지 마세요. 상처 물 들어가면 안됩니다.

아무리 열 채이는 일이 있어도, 그 때를 벗어나면 풀어버려야 한다. 매너놈이 그렇게 성급하게 발길을 옮겼던 건, 아마도 그렇게 뻗친 열을 매너놈이 콘트롤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일게다.

그런 교훈과는 별개로, 머리에 스테이플러 날이 두 개 박혀있는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고 웃겨, 공장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다. C선배한테 인사하다가 머리 박아 대가리 빵꾸났어요. 그래서 머리 감지 말라는군요. 당분간 제 주위 가까히 오지 마세요. 덕분에 공장 안에서 슬램스틱 코미디꾼으로 매너놈은 거듭났다.

덧붙여_한 손으로 머리의 상처를 누르며 공장 근처 병원 응급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안경알까지 묻은 핏자욱이 가로등 아래를 지나다 눈에 들어왔다. 피 질질 흘리고도 실실 쪼개며 십자기 간판을 찾아가는 꼬락서리가 우스워, 오늘 점심을 뜯고 오후동안 잠시 작업반장 뒷담화를 함께 나눈 ㅂ에게 전화를 했다. 늦게 죄송합니다. 제 꼴이 우스워서요. 무슨 일 있어요? 저 지금 머리에 피 칠칠... 칠칠 흘리면서 응급실 가서 꼬맬려고 걸어가고 있어요. 어머. 무슨 일이에요. C선배한테 인사하다가 신호기 컨트롤 박스 모서리에 머리 들이받았는데, 두바늘정도 꼬매야 한다네요. 푸하. 오늘 팀장님이랑 회식있다 하지 않았어요? 이판국에 술 못먹지 뭐. 설마 술먹기 싫어서 일부러 들이받은거 아네요? 이것보세요. 제가 매저끼가 좀 있지만 그정도는 아니거든요. 정도껏이지. 어쨌든 조심하세요. 네. 저녁시간 잘 보내시고요.

덧붙여_둘_머리 감은지 딱 일주일째다.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08. 10. 5. 21:19
요즘 피아노 앞에 앉아 모차르트의 K. 265를 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저질체력의 젊은이가 비전을 하나 얻어 그 책에 나온 도해와 방법대로 죽어라 연습한다. 그렇게 죽어라 하다보니 그 책의 모든 무공을 그림대로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비전에는 여기 소개된 무술대로 칼을 내리치면 바위는 물론 쇳덩이도 두부처럼 자를 수 있고,  못 물리치는 적이 없다고 했다. 의기양양한 이 막장체력의 젊은이, 집구석 가보로 내려오던 보검을 움켜쥐고 그 도해대로 힘차게 집구석 앞 마당의 바위에 초식대로 내리치나 쩡. 하는 소리 뿐, 바위에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대체 왜그럴까? 답은 아마도 이 젊은이의 '저질체력'에 있을 것이다. 운공이고 뭐고간에, 제대로 칼을 쥐고 내리칠 기본 체력이 없는데 거기에 잔재주 더해 봐야 뭐할 것인가.

레슨 시작한 지 세 달이 넘었다. 이제 K. 265의 모든 변주는 언제 어떻게 손을 뻗어 짚는지 머리속에 다 들어있다. 손가락도 얼추 따라간다. 문제는 이를 정확히 수행해 낼 '기본'이 내 몸에 배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변주 2번 마지막 부분에서 1 ~ 3도를 차례로 왔다갔다하며 왼손이 한 음계를 짚어내는 부분, 손은 얼추 따라가지만 막힘없이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한다. 바로 이게 문제다.

그렇다고 이 부분을 죽어라 반복연습하면 해결될 문제냐. 아주 시간이 많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다른 데 있다. 음계 하나를 무리없이 짚을 수 있을 정도의 왼손 손놀림을 먼저 연습하고, 그 다음에 이 곡을 연습하는게 거다. 가장 효율적으로 그러한 손놀림을 몸에 배게 하는 건, 매너놈이 아는 한 극악의 하농 노가다 뿐이다. ㅜㅜ

그런 전차로, 오늘은 하루 종일 하농의 스케일만 짚었다. 손이 제대로 풀린다고 할까. 두어 시간을 죽어라 하농 짚다가 K. 265나 다른 곡을 짚어 보면 확연히 손이 잘 돌아간다. 반세기동안 꾸준히 피아노 연습 교재로 팔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작은 계획을 하나 잡았다. 10월 안의 목표로. 하루에 무조건 하농 스케일 한 조씩 떼는 걸로.  이걸 마치고 나면 한 단계 더 올라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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