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字錄2012. 6. 10. 10:55


토마스 체헤트마이어 현악사중주단의 슈만 현악사중주 1, 3번 음반이다. 금요일에 여자친구 집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발견하고 지화자를 외치며, 반어거지로 뺏어왔다. 저 표지를 보는 순간, 2003년의 가을이 생각나서였다.


수학과외 두 개와 함께 죽자고 공부하던 복학생 시절이었다. 오후 두 시 수업이 끝나고 잠깐 짬이 날 때, 기숙사 앞 벤치에 누워 1FM의 명연주 명음반을 들으며 이런저런 잡서를 읽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건너방 살던 인도 녀석이 "야, 어떻게 너는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냐?"는 물음에, 넌 윈도우 쓰면서 멀티태스킹도 안 하냐고 받아치며 웃던 시절이다. 과외로 한 달에 60만원을 벌고, 그 중의 절반을 저축했다. 휴학하고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0만원으로 한 달을 사는 건 꽤 퍽퍽했다. 책은 주말에 서울가서 헌책방 돌아다니며 만원에 몇 권을 샀고, cd는 고클래식의 중고 장터를 열심히 뒤졌다. 듣고 싶은 신보도, 탑 프라이스 음반 15,600원이 만만치 않아 속만 끓였다. 그 갈증을 달래기 위해, 1FM의 명연주 명음반을 통채로 녹음해서 들었다. MP3치고 지직거리는 음질도 문제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연주자들에게 댓가를 치뤄 주지 못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고작 이렇게 다짐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내가 돈 벌게 되면, 녹음한 음반들, 반드시 cd로 사서 들어야지." 그런 음반 중 가장 대표적인 아이가 저것, 내가 가장 열심히 서양고전음악을 듣던 2003년 가을, 그라모폰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된 토마스 체헤트마이어 현악사중주단의 슈만 현악사중주 녹음이다.


들어보면 일단 다른 cd들과 차원이 다른 음질에 놀라게 된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잔향과 칼 같이 딱 떨어지고 깔끔한 소리, 현악사중주 음반, 그것도 녹음이 많지 않은 슈만 현악사중주가 그라모폰 올해의 음반이 된 이유가 분명 있었다. 그때, 풍월당 가서 몇 번이고 이 음반을 들었다 놓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왜 못 샀으랴. 하지만 그당시 탑 프라이스보다 몇천원 더 받은, 2만원에 육박하는 음반값은, 무언가 마음의 장벽을 만들었다. 제대로 된 오디오도 없던 탓에 256Kb의 MP3로 들을 게 뻔하던 시절, 음질 좋은 CD는 사치일 따름이다라는 생각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술 한번 안 마시면 되는데. 그 생각을 하면서도 끝끝내 집지 못했다. 단지, 낙소스의 저렴한 음반이, 슈만 현악사중주 1~3번을 다 담고 있는 녀석으로 대리만족했고, 세 곡이 모두 익숙해졌을때, 저 음반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다시 학생이 되었다. 직장에서 받던 월급의 절반 이하를 연구보조비로 받으며 읽고 쓰는 게 전부인 일상을 살고 있다. 늦은 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새벽 한시가 허용하는 최대 볼륨으로 이 CD를 들었다. 기숙사 앞 벤치를 비추던 따사로운 햇볕과, 거기에 기대어 슈테판 츠바이크의 전기소설들을 읽고, 명연주 명음반에 귀 기울이면서, 싸구려 캔커피 혹은 커피우유를 빨대로 마시다가 꾸벅꾸벅 졸던 나의 스물 다섯살이 생각났다. 도저히 참기 어려워서, 쓰레빠를 끌고 편의점에 가서 캔맥주를 한 캔 더 사왔다.


"이윽고 그것은 내 눈 속에서 번졌고, 넘쳐 흐르다가,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로저 젤라즈니,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마지막 문장)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