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字錄2012. 12. 20. 14:58

어제 책상 앞에 앉아 읽히지 않은 책을 읽고, 써지지 않는 보고서를 쓰다가 잠이 들었다. 보고서는 마무리 하지 못했다. 그러고 멍하니 버스를 타고 연구실에 왔다. 고작 내가 '비판적'으로 지지한 후보가 떨어지고, 본능적 거부감에 면상도 보기 싫은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 시대가 닫힌 걸 실감해서이다. 거시적 차원의 시대변화를 즉자적 차원에서 의미부여하는 짓거리는 유치찬란한 짓이자 미성숙의 증거임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힐 정도로 내 생각이 여물지 못했으니 어쩌랴. 


15년 전 수능 마치고 특차로 지방의 공대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먹은 때였다. 그때 내 동명이인이 경합끝에 당선되어 국민의 정부가 열렸다. 그의 취임 첫 해는 내 대학 입학 첫 해이기도 했다. 집구석에서 떨어져 수원에서 기숙사 생활과 과외를 하며 읽고 쓰는 생활을 시작했다. 시덥잖은 연애질과 도서관 섭렵, 종이접기와 같은 잡스러운 취미생활을 헤메이다 토익을 보고 군대에 갔다. 적당히 빡세고 적당히 널널한 군대에서 셜록 홈즈를 영어로 읽고 일기를 썼다. 병장을 달 때 즈음, 노무현이 광주 경선의 기적을 일으키며 여권 대선주자로 떠올랐다. 적잖게 그에 열광했다. 아, 빼먹을 뻔 했다. 이번 대선 이상의 딜레마와 좌절을 안겼던 2002년 지방선거의 서울시장 부문. 가카 VS 김민새. 대책없는 청계천 갈아엎기와 노가다판 끝판왕, 그리고 악질 운동권 괴수와의 대결. 고민하다 가카 한성부 입성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김민새를, 아주 더러운 기분으로 찍었다. 그때부터 시작한 비례대표는 별 고민없이 민주노동당을 찍기 시작했다. 


내 동명이인 이상의 우여곡절을 거쳐, 참여정부 시대가 열렸다. 내가 열렬히 지지한 정치인의 집권에 처음으로 찝찝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른다. 참여정부를 설명하는 국정홍보처의 캐치프레이즈를 공모한 결과가 고작 "어서오십시오, 참여정부입니다" 라니. 감각이 그렇게도 없나 이놈의 노친네들. 혀를 끌끌 차다가 대북송금 특검을 받았고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소리에 짜증을 냈다. 그때즈음 복학해서 모가지 내 놓고 공부하며, 랩실 생활도 조금 하며 일도 해 봤다. 부안 방폐장 아사리판에 기가 막혔다. 일년 일과 공부와 과외하다 지쳐 휴학했을 땐, 탄핵 사건에 기막혀했다. 그날 한겨레 만평에 탄핵을 거꾸로 하면 핵탄이 되어, 여의도 국회에 핵탄두가 터지고 조순형 의원과 최병렬을 희화하한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혀를 끌끌 차며 어차피 다른사람이 다 찍어 줄 테니까 안심하고 민주노동당 지역구 후보와 비례대표에 별다른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었다. 그러고 6주간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파리의 민박집에서 대통령 탄핵 무효 소식을 들었다. 돌아와서 공부를 계속하려던 진로를 바꾸어 공기업 입사 준비를 시작했다. 노통은 여전히 짜증을 부렸고, 열린우리당은 지지부진했다. 


노통 집권이 반환기를 돌기 조금 전, 조그마한 공공기관에 노가다판 공돌이로 취직을 했다. 노통의 성은을 제대로 입었다. 공공기관 입사시 학력 철폐로 인해, 졸업예정자도 아니었던 휴학생인 내가 원서를 넣을 수 있었다.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는 선배와 최종면접장에서 만났다. 나는 붙고 선배는 떨어졌다. 그 덕에 학교에 인사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학부 졸업도 못한 놈에게 대학원 졸업자가 밀려서 분위기 더럽다나 뭐라나... 나를 랩실에 잠시 두던 교수님은 절대 네버 취직하지 말고 대학원 오라고 했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첫 발령지 울산에 짐을 꾸려 내려갔다.


첫 발령지 울산에서, 조용히 읽고 쓰고 듣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거기서 황우석 사태를 만났다. 노통이 미쳤다고 생각했다(아주 나중에, 그러니까 얼마 전 한학수 PD 대학원 강연 질의응답때 들은 바로는, 청와대 민정 라인은 끝까지 몰랐고 - 그러니까 무능했고 - 안기부와 과기 라인은 사태를 파악했으나 보고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덧붙여, PD수첩 2부 방영 전날 찾아온 참여정부의 전직 장관은 청와대의 밀명을 받고 움직인 게 아니라, 그사람도 속아서 자체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라 한다). 전작권 환수와 관련한 노통의 대갈일성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에는 짜증이 버럭 났다. 


그때 즈음 노가다판 공돌이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의 본부 기획실로 갔다. 조직평가/개인평가를 맡았다. 노가다판에서 벗어나면 이런거 안하겠지 하는 생각은 착각뿐, 모든 걸 다 해야 했다. 필요에 따라 10만줄짜리 엑셀을 만지기도 했고, SQL을 익혀 성과관리시스템 손을 봐야 하기도 했다. 이런 데 시달리다보니 대연정은 개소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김용철 변호사와 삼성 특검이 떠올랐다. 삼성 계열사의 재무부서에 다니는 친구녀석은 자료 폐기를 비롯한 각종 살벌한 업무에 시달리다 사표를 내고 증권사로 옮겼다. 그리고 가카가 등장했다. 2007년 울릉도로 혼자 여름휴가를 떠나는 묵호항 터미널에서, 박근혜가 경선 패배에 승복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BBK가 터지고 민주당의 방황과 함께 민주노동당이 "코리아 연방"이라는 뜽금포를 터뜨리고 나왔다. 문국현은 눈에 비치지도 않았다. 판은 끝나 있었다. 더러운 기분으로 권영길을 찍으면서 뇌까렸다. "씨발 3%이상 나오지 마라." 정말 3%나왔다. 그리고 가카 RISE...


가카의 어렌쥐 인수위 시절, 노가다판 공돌이는 기획실 평가담당 머슴으로 변해 있었다. 12/31일 시무식 마치고 집에 갔다가 기획실 전원 출근하라는 소식에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한나라당 100대 공약에 맞춰 무슨 일을 할 건지 1/2 아침 9시에 인수위에 보고한다고 했다. 한반도 대운하에 맞춰 한국의 교통체계 선진화를 앞당기고 어쩌구 하는 개소리를 와꾸 맞춰 쓰며,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강도의, 최악의 자괴감을 느꼈다. 그 이후의 변화? 변방의 찌질한 공공기관 말직에 있어도, 정말 이 작자들 갈때까지 가는구나, 이런 말이 나오는 상황을 꽤 자주 목격했다. 명박산성과 고소영 이런 거 다 재껴두더라도 말이다. 조금만 이어붙이자면 고대출신 이사장이, 현대 출신/소망교회 집사가 사외이사로 왔다. 하다못해 기획팀장까지 고대 출신 쓰레기가 내렸다. 매일매일을 그 쓰레기와 싸우며 살았다. 더는 못해먹겠다 싶을 때, 행정학 석사 과정 1년짜리 교육 파견 기회가 생겼다. 모가지 내 놓고 한달간 TEPS를 준비해서 간신히 교육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석사 첫 학기가 끝날 무렵, 회사를 관 두고 계속 공부할 결심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회사 생활 1년. 레임덕인지 숨어지내는지 모르는 가카와는 별개로, 회사는 전보다 더 지랄맞았다. 나는 전처럼 머슴같이 일하지 않았다. 짜증 낼 일은 짜증 내고 화 낼 일은 화 내면서 전보다는 속 편하게 회사를 다녔다. 그리고 올해 2월, 마음 편히 사직서를 썼다. 지난 1년, 무언가 어수선했다. 교수님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도, 공부도,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두 번째 학기에는 석사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계실습을 강의를 시작했다. 몇 번 헤멨다. 수업은 따라가기 벅찼다. 몇 번 빠지기도 했다. 한 학기가 끝나간다는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박근혜의 부상과 민주통합당의 지리멸렬함은 짜증스러웠다. 공부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데 대한 짜증과 같이 상승효과를 불러 일으켜, 올해 하반기의 학교생활을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두 개는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게 사실일 게다. 하지만 그런 외부의 짜증, 그로 인해 "비판적 지지"를 할 수 밖에 없던 불만족스러운 심리 상태가, 학업에 영향을 미친 건 일정부분 사실이었으니까. 이것도 내가 정신 덜 차린 탓이긴 하지만. 하여튼 이러한 불만족과 짜증의 귀결은 만족스럽지 못한 기말 시험 두 개와, 박근혜의 집권이었다. 


박근혜의 얼굴이 크게 실린 조간신문을 보며, 모래알같은 밥을 삼키고 학교 오는 길에, 민주당 정권, 내 동명이인과 노통 집권기에 보낸 20대, 대학생 시절과 직장 초년생 시절이 묘할 정도로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저질 낙하산과 무능한 노친네들의 지시를 받을 수 밖에 없던 직장생활 중/후반부가 가카 집권기와 맞물려 돌아갔던 게, 이상하게 아귀가 잘 맞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닥 만족스럽지 못했던, 엉망진창이었던 지난 학기를 박근혜의 승천과 민주통합당 및 좌파들의 지리멸렬과 함께 병렬적으로 생각해 보니, 이것 역시 이상하게 잘 어울리는 것 처럼 보였다. 그 종착점이 박근혜의 집권이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공부하는 학생이 아닌, 직딩의 정신상태로 학교에 "출/퇴근"했던 것 같다. 두 가지가 모두 지리멸렬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던 게 아닐까. 지리멸렬한 시대의 끝자락과, 아직 직딩의 허물을 벗지 못한 내 지난 일년. 그걸 생각하니, 이제야 내 직딩으로 뭉쳐졌던 지난 삼십대 초반이 완전히 닫힌 것 같았다. 


박근혜의 5년. 그 안에 나는 읽고, 쓰며, 그러다가 졸업을 할 것이다. 그때 되면 포닥이든 뭐든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고. 그때는 박근혜 집권 말기가 될 것이다. 여전히 민주당 계열과 좌파는 지리멸렬할지도 모르겠다. 그것과는 별개로, 읽고, 쓰는 일을 꾸역꾸역 해 나가며 계속 난 헤멜 것 같다. 이왕 헤멜 거, 조금은 즐거운 게 더 나을 거고, 조금은 더 낙관적이어야 할 게다. 잡념과 distraction을 줄이고 읽고 쓰는 데 집중해야 하니까. 어쨌든 이렇게, 한 시대가 완전히 저물었다. 건조하게 말하자면 내 이십대에서 삼십대 초반이 지나갔고, 느끼하게 말해서 "내 젊음이" 완전히 소진되었다. 내년 내 나이는 서른 다섯이다. 




p. s. 흐름상 연애 이야기는 제외했다. 두달 후면 유부남이 될 사람의 마땅한 도리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조만간에 읽을 "그 분"이 양해해 주시겠지. =)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