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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9. 3. 9. 00:56
"나 당신에게 프로포즈 안해요."

그렇게 알고 누나라 부르던 6년, 애인으로 지낸 3년의 세월을 닫은 지 이십일쯤 됐다. 술기운을 못 이겨 문자 몇 개를 보내고 전화 한 통을 걸었다가 바로 끊었다. 연애편지와 카드는 공장 파쇄기에 갈았다. 이런저런 장식이 붙은 카드는 파쇄기가 고장나는게 염려되었다. 카드에 붙은 작은 플라스틱 조각과 쇳조각은 먼저 떨궈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핸드폰과 컴퓨터에 남은 사진은 모두 지웠다. 인화해놓은 사진은 차마 파쇄기에 돌리지 못했다. 규격봉투에 넣어 세 장의 편지와 함께 그녀 집으로 부쳤다. 규격봉투에 두 장의 우표를 정방향으로 붙였다. 풀을 쓰지 않고 우표 뒷면을 혓바닥에 가져다 대고 두 바퀴를 돌린 다음 규격봉투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 붙였다. 공장 앞 문방구에서 그짓을 하다 보니 앞건물 통합DB팀의 J선배가 있다. 선배에게 오버스런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말을 섞다보니
그녀가 연하의 남자와 6월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말했다. 축하인사를 건내며 방금 전 옛 애인에게 뽑아놓은 사진을 부치고 돌아서는 길이라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J선배는 놀란 눈치였다. 을씨년스럽게 비가 내렸다. 

이별 후 출근없는 주말을 처음으로 맞이했다. 늦잠을 자고, 남대문에 안경을 하러 갔다. 3년. 간신히 한달 수입이 200만원을 상회하던 공장 2년차 첫자락에 무리를 해서 oliver peoples의 코받침 없는 안경을 장만했었다. 그 기간과 지난 애인을 만난 기간은 거의 일치한다. 매너놈이 가장 좋아하던 디자인의 안경테였지만, 그 미련을 놓을 때였다. 10년째 다닌 남대문의 안경점에 안경을 하러 가면서 피식 웃었다. 내가 미쳤지. 지난 한겨레에 쓴 글 처럼, 만원에 두장짜리 리어카 와이셔츠 애호가 주제에 올리버 피플스는 무슨. 네모난 뿔테를 찾다가 착용감이 편안한 국산 뿔테를 발견했다. 기본으로 불러주는 가격을 후려쳐서 2만원쯤 깎고는, 올리버 피플스 안경테 갚의 1/3도 안 되는 사각 뿔테를 장만했다. 유연한 안경 다리가 편하다. 안경사 아줌마는 안경다리를 연신 흔들며 메모리 소재 어쩌구 말했다. 사각 뿔테가 꽤 맘에 들었다. 

집구석 근처 동대문 도서관이 리모델링중이라 종로의 정독도서관을 걸어서 갔다. 네 권의 책을 빌렸다. 

박정희 정부의 선택, 기미야 다다시
  - 지난 12월 애인을 데리러 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눈에 들었다. 그때 비올라 가방을 메고 있던 커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었다. 여성은 자기 손이 현악기 할 손이 아니라 한숨지었고, 누군가의 손이 가늘고 기능적이라 현악기 할 손이라 부러워했었다. 왜 이런게 기억이 나는 걸까.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에케하르트/볼프강 슈테게만
  - 김규항 홈페이지에서 발견. 빠르게 흟어나갈 생각이다. 

피아니스트를 위한 손가락 체조, 무라카미 타카시
  - 토요일 안경 맞추고 돌아오는길에 들른 영풍에서 발견한 책. 피아노 앞에 앉지 않고서 손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참고할 예정이다. 

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 머릿속을 몇 시간동안 비워버릴 수 있는 일본 추리소설이 필요했다. 세 권을 빌리고 난 다음, 한 권의 대출 여유가 있었다. 정독도서관에 남은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책 중 유일한 한권짜리였다. 

정독도서관을 나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앞의 세 권 서문을 훓었다. 피아니스트를 위한 손가락 체조 간단한 걸 따라서 하고는, 용은 잠들다를 백 페이지정도 읽었다. 밥먹을 시간이 되어 집구석으로 돌아갔다. 용은 잠들다를 반신욕하면서 마저 읽고 피아노 연습과 일본어 공부를 하다보니 하루가 갔다. 

헤어진 이후 처음 맞는, 온전한 주말이 흘러갔다. 마음이 한결 더 차분해졌다. 충만한 주말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P선배가 발리 커피를 주었다. 단맛을 뺀 쌍화탕 맛이었다. 선배가 말한 '독특한 맛'이란 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이별 사실을 안 그녀는 적잖게 놀랐다. 그런 반응이 그녀뿐만은 아니었지만. 그전에도 애인과의 결혼문제, 좀 더 정확히는 혼수 문제를 이야기할때, 그녀는 말했다. 매너놈씨가 지쳐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애인님이 알아주길 바란다고. 공장 메신저 대화창에 뜬 그 이야기가 가슴에 박혔다. 그런 P선배가, 지난 금요일 오후에 말했다. 

행복해지세요. 

매너놈은 웃었다. 아주 활짝. 그럼요. 고마워요. 선배. 주말 잘 보내시라우. =)



새 안경을 하고 꽉 찬 주말을 보내고 난 지금, 매실주 200ml한 잔을 마셨다. 
사각 뿔테와 함께, 온전한 30대가 열렸다. 아직은 나이먹는게 좋다. 십대보다는 이십대 초반이, 이십대 초반보다는 이십대 후반이 더 행복했다. 남조선 나이 서른이 조금 지랄맞긴했지만 그거야 아홉수라 치면 별 거 아니니까. 이진수처럼 살자. 0 아니면 1이다.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