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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17 연습실 칸막이 너머로 들은 쇼팽 연습곡
打字錄2008. 9. 1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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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쇼팽 연습곡 엘범. 매너놈이 꼽는 "인간 같지 않은" 소리의 음반 중 하나다.

연휴가 끝난 어제, 유난히도 피곤한 몸 끌고 연습실 갔더니 생전 처음 보는 마르고 눈 큰 매너놈 또래의 아낙이 선생님 자리에 앉아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일단 고개 꾸벅 인사하니 누구 찾으러 오셨냐 묻는다. 원래 선생님이 한 분 더 계셨나보다 하고 성인반인데 연습하러 왔다 하고, 여섯 개의 연습실 중 가장 건반이 묵직한 방으로 들어가 악보를 놓고 앉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손 풀 겸 모차르트 K265 한 사이클 돌고 내일 마지막 확인 받아야 할 소나티네 곡을 연습하다가 옆 연습실에서 내게 아주 익숙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멜로디가 따박따박 들려온다. 쇼팽 연습곡 op10 - 12. "혁명"이었다. 순간 매너놈은 건반에서 손을 떼고, 선풍기 전원 내려 팬 소리도 죽이고 칸막이 너머의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난생 처음 보는 내 또래 아낙의 "혁명"은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했다. 도입부의 오른손 화음이 번번히 어긋났고, 저음부와 고음부를 꽤 빡세게 오고가야 할 왼손 화음도 번번히 끊겼다. 누구에게나 익숙할 주제도 매끄럽고 강하게 치고 나가질 못했다. 쇼팽 연습곡이라면 물론 어렵긴 하지만 음대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라면 감정이입과 아티큘레이션은 둘째 치더라도 기계적으로 정확한 음을 짚어나가는 수준 까지는 무리없이 한다고 매너놈은 들은 바 있다. 작곡 당시 '연주불가능'이란 판정을 받곤 했다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널리 연주되는 만큼, 지난 시간동안 건반에 손 올리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연주능력은 훌쩍 높아진건 물론이다. 그렇기에, 냉정히 말해, 그녀의 피아노 소리는 '피아노 선생님'이란 타이틀을 붙이기엔 그리 넉넉치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매너놈은 그렇게 드문드문 브레이크가 걸리는 쇼팽 연습곡을 들으며 청승에 빠졌다. 바이엘에 체르니만 반복하며 하루 절반을 보내다가, 그것도 절반 너머는 엄마 등 떠밀려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아이들 어르고 달래가며 오만 스트레스 쳐 받다가, 아이들 다 가고난 다음에야 오래 전, 그녀도 입시 준비하던 시절 무리없이 짚어나가던 곡을 지금에야 안 움직이는 손 애써 돌려가는 마음에 생각이 닿아서 말이다. 그녀도 10년 전에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나 엘렌 그뤼모, 안젤라 휴이트 같은 피아니스트를 콘서트 피아니스트를 꿈꿨을게다. 그러나 지금은 제대로 음도 맞지 않는 피아노 앞에서 하루의 절반을, 바이엘과 체르니, 그리고 더욱 더 만만치 않은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는 와중에 속 망가지는 만큼 손이 굳어졌을게다.

몇 년 후, 언젠가 매너놈도 쇼팽 연습곡을 짚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녀와 똑같은 부분을 제대로 헤멜지도 모른다. 그때 다시 어제의 쇼팽 연습곡이 생각날지 모른다. 이제 지금 그녀의 마음을 넘겨짚는 건 무례한 일일게고. 그때쯤 무슨 마음일까. 그때쯤 가늠 한 번 해 보고 싶다. 거기에 십년, 아니면 이십년 전의 시간이란 변수까지 짚어야겠지. 아무 생각없이, 그전까지 그저 건반 짚을 뿐이다.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