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字錄2014. 6. 29. 14:10

연구실의 K가 대형사고를 쳤다. 수습할 방법이 없다는 게 첫번째 문제다. 더 큰 문제는, 보스가 이를 수습하려고 시도하는게 우리는 물론이고 보스에게까지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일이라는거다. 일이 그렇게 된 이상, 나는 K에게 지랄을 할 수 없었다. 수습가능한 거라면 지랄 한 번 세게 하고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대로 하고 있는지 족치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수습할 수 없는 일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랴. 가능한 한 "이런 이야기 하는 게 정말 안타깝고 미안하지만..." 이란 말머리를 붙여가며, 녀석의 눈앞에 닥친 현실이라는 괴물의 형체를 대강이나마 이야기 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고 K의 대형사고에 원인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녀석은 연구실 출입구에 가장 가까운 자리이자, 내 서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다. 그런지라 오며가며 녀석의 책상이 눈에 가끔 들어온다. K는 다짐이나 할 일을 책상 앞에 포스트잇이나 메모지를 써서 붙여놓는 습관이 있다. 어느순간 내가 보고 뜨악한 게 하나 있었다. "행정일은 최대한 기계적으로, 영혼없이." 나는 그때 K가 오만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기계적으로, 영혼없이" 처리하기에, K의 행정사무처리 능력은 너무도 형편없다(그와 반대로, 학문적으로는 보스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학생이 K이다). 그런데 행정사무라는 일의 성격상, 하는 사람이 빵꾸내면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에게 적잖은 민폐를 끼치는 일이다. 그렇게 빵꾸 몇 번 나면 평판도 덩달아 떨어지게 된다. 역시나, 심심치 않게 뚫린 빵꾸를 동료들이 꽤나 많이 메꾸어주었다. 말로는 고맙다고 하지만 그런 일이 빈번해지니 지나면 지날수록 립서비스 정도로만 느끼게 되는 측면도 있고, 더 큰 문제는, "얘는 그거 안 되는 얘"로 찍혀버리기 딱 좋다는 거. 


더 큰 문제가 있다. 세상에는 K의 말마따나 "최대한 기계적으로, 영혼없이"하는 일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우리는 '사무직'또는 '행정직'이라고 부른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메뉴얼화되어있는 일은 정말 '기계적으로' 쳐 나가겠지만 그것만으로 커버할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은 수시로 터진다. 바로 그들이 적잖은 연봉을 받는 이유는 그런 "예외적"인 경우를 많은 사람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유연함 때문이다. 그런 일을 "기계적으로 영혼없이"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무시무시한 능력자이다. 


지금의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 K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 지난 학기와 이번 일을 거치면서, "자기 일 말고는 주변에서 뭔 일이 터지는 쌩까서 결과적으로 민폐를 끼치면서, 나중에야 말로 대강 무마하려는 성향의" 캐릭터였다는 걸 내가 너무 늦게 알아서 이미 마음속으로 아웃시킨 캐릭터긴 했지만, 그래도 한 때 연구실에서 가장 믿을만한 동료가 될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한 적이 있던 건 사실이니까.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