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字錄2014. 7. 10. 17:00

보스나 나나 완전히 뒤통수 맞은 일이 하나 있었다. 그덕에 팔자에도 없는 프로젝트에 빨려들어가 회의자료를 만드는 데 하루의 절반을 보낸다. 오랜만에 해 보는 기획실 직원 코스프레다. 산더미같은 자료를 파일과 문서로 쌓아두고 엑기스만 짜내 내부회의 초안을 만든다. 분량은 20매 정도. 정식 회의에 얹기 위해, 이걸 다시 3-4장으로 줄인다. font는 15에 줄간격 200%. 폰트가 너무 크지 않느냐는 후배들에 지적에, 최종보스는 "아우, 글꼴 커서 눈이 시원시원하다"로 답했다. 이번 회의자료의 최대 성공 요인은 15pt로 키운 폰트라며, 보스와 나는 낄낄댔다. 


조금 전 만든 최종회의자료를 들여다본다. 휴먼명조 15pt에 줄간격 200%, 부가설명으로 중고딕 13pt에 줄간격 160%. 요약은 회색 박스 안에 줄간격 130%으로 중고딕 13pt 다섯 줄. 오랜만에 각 잡고 만든 회의자료를 보니 3년 반 동안 박박 굴렀던 기획실 평가팀 생각이 났다. 걸레 빨아 행주 만드는 일이라 자조했던 시절의 깜냥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기분이 마냥 좋은 것 만은 아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헛되게 보냈다는 자괴감이 다시 밀려든다. 


내게 옛 직장은 그런 곳이다. 원치 않은 skill을 여럿 익혔으나, 시간이란 가장 소중한 자원을 지나치게 낭비했던 곳이다.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