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piring pianist2008. 12. 9. 22:24
매너놈이 피아노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한 게 올해 7월이다. 그때부터 어떻게 소문이 퍼진 거 절반, 같이 하자고 꼬신 거 절반 해서 매너놈이 끌어들인 공장 직원이 7명이다(모두 여성동지라나~). 이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피아노 동호회라도 공장 안에 만들어야 하는거 아니냐, 매너놈씨 이렇게 사람들 끌고 왔으니 회비 레슨비 한 달 면제받아야 되는거 아니냐 등등등 농담따먹기를 나누곤 한다.

그러던 와중 농담삼아 선생님께 농담을 던진 적이 있다.

"공장 사람들 많이 데려왔는데 저 레슨비 할인 안되나요?(멋적은듯 웃음)"
"(푸훗 웃으시면서)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에이, 밥을 사면 제가 사야죠."
"꼭 그런 게 아닌데. 이번에 성인반도 많이 늘어서 디지털피아노실 없애고, 진짜 피아노 더 들여올 거에요."
"아, 정말요?"
"네. 아마 담달 중에 그리 될 거 같네요."

지난 주 금요일은 매너놈네 공장 작업반에서 가장 큰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레슨 째고 어제 저녁 건너갔는데 와, 이빨 빠지고 건반 잘 안 올라오는 고물 피아노들이 모두 교체된 건 둘째치고, 새 피아노 열 대가 새로 들어온거다. 나무 니스 냄새도 아직 덜 빠진 새 피아노 열 대가 칸칸히 놓여있는 모습에 매너놈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기존 연습실의 중고 피아노가 업라이트 최고 모델인 131cm짜리였음에 비해 121cm짜리라는건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새 피아노인데 가릴소냐. 어제 저녁 이 피아노 저 피아노 두들겨보며 어느 녀석이 좋은 소리를 내나 돌아다녔다. 처음엔 건반이 가장 묵직한 피아노를 잡고 길들이려 했지만 한 녀석이 건반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가장 덜 나고 다른 녀석들에 비해 워낙에 좋은 소리가 나서 그녀석을 길들이기로 했다. 그래봤자 지난주까지 매너놈이 쓰던 피아노보다는 훨씬 건반이 무겁긴 하다.

연말 공장업무 성수기가 시작되는 즈음이라 매너놈의 연습시간은 점심시간 한시간 이십분, 저녁시간 한시간 정도다. 점심은 두유나 김밥으로 때우고, 저녁은 김치볶음밥이나 제육덮밥을 다녀와서 일하며 삼십분동안 씹어먹거나 굶는다. 그걸론 양이 안 차, 오늘 퇴근하자마자 대강 저녁을 때우고 세시간동안 새 피아노를 길들이다 왔다. 아직 덜 길들여져서 낮은음자리 쪽의 건반을 짚으면 먹먹한 소리가 나고 터치도 뻑뻑하기 그지없다. 이게 정말 마약같은 재미가 있는 건, 계속 치면 칠수록 길들여지는 소리가 점점 저음쪽으로 내려가는게 느껴지는거다. 무언가에 홀린 듯, 체르니 30번 중반의 테크닉이 허용하는 거의 모든 곡을 총동원하여 피아노를 길들이다 왔다. 그렇게 세시간을 보내고 나니 손가락은 물론이고 팔꿈치 아래쪽 관절이 모두 먹먹하다. 주먹을 꽉 쥐는 게 힘들 정도다.

여러모로 아주 지랄같은 일 많던 2008년이었지만, 피아노를 제대로 시작했다는 것 한가지만으로도, 다른 모든 지랄같은일을 잊을 수 있지 싶다. 며칠 안 남은 올해, 할 데 까지 해 볼거다. 그리고 연말쯤 시간 잡아서 성인반 사람들하고 저녁이나 한 끼 먹으러 가야지. 꼼꼼한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도 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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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iring pianist2008. 12. 2. 00:03
주말까지 공장 나갔다 집에 돌아오니 그닥 많은 시간이 남지 았았다. 억울해서 혼자 맥주 한 병을 비웠다. 적당히 알싸한 기분에 취해 방구석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부터 IMSLP에서 다운받아 틈틈히 찍어놓은 교향곡과 협주곡 총보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거짓말 조금 보태 매너놈의 몸통만한 D링 바인더를 펼쳐 피아노 앞 보면대에 펼쳐놓았다. 새벽 한시가 허용하는 가장 높은 크기로 볼륨을 맞춰놓고, 피아노 파트를 오른손만 한 음 한 음 짚어보았다.


아주 천. 천. 히. 하나 하나 짚어보고 박자를 맞춰보니 얼추 익숙한 소리가 나온다. 그렇게 두 마디를 익혔다.

그러고나서 오늘 점심시간, 레슨을 받고 연습을 마친 후 남은 짜투리 시간 몇 분 동안, 주말 밤 디지털피아노 앞에서 짚어 본 이 멜로디를 업라이트 피아노 앞에서 짚어 보았다.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손에 힘을 빼고 긴장을 풀어 부드럽고 섬세하게 치려 해도 깡통으로 유리판 내리치는 소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묵직하면서도 따듯한 길렐스의 소리도, 소름끼치도록 깔끔하게 날이 선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소리도, 불타오르는 패기 어린 레온 플라이셔의 소리도 내기 힘들다. 여러 번을 반복하다보니 화음을 정확하게 두드리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족히 이삼십년은 묵었을듯한 연습실의 피아노 탓이라기보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터치의 수준이 그정도였기 때문일거다. 역시 아직 나는 멀었다.

여섯시, 저녁밥을 시켜놓고 다시 공장 밖을 나섰다. 악보를 들고 피아노 앞에 앉아 한시간을 더 치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열 시 십오분까지 모의평가보고서 여섯 장을 쓰고, 앞건물 방송국과 센터에 건너가 지인들과 말을 섞다 나왔다. 열한시까지 , 아직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시덥잖은, 그러나 따스한 농담을 섞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화요일을 맞은 지금, 술이 고프다.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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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1. 24. 23:22
하나. 간만에 뻑뻑하게 일했다. 오전 내내 내부고객만족도 조사 뒤치닥거리에 매달렸다. 퇴직하면 자동으로 인사 DB에서 삭제되는 문제가 있던 걸 개선해서 사내 인사시스템과의 연계 체계를 이중으로 만들어놨더니 이제 무심결에 물리면 퇴직자가 재직자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현재 인사DB와 대조해서 일일히 노가다를 쳤다. 뒷골 땡겨서 각 담당자들에게 이중 확인시킨 명단도 나름 제 몫을 했다. 무사히 조사가 끝나기만 바란다.

둘. 여전히 건반 앞에 선 매너놈의 손은 둔하다. 이정도면 됐거니 싶어 몇 번 연습하지 않은 소나티네 5번은 어김없이 선생님 앞에서 헤멘다. "지난시간과 그다지 달라진 게 없네요." 떱떠름한 스승의 표정 옆에 앉은 매너놈의 속은 쓰라리다. 똑같은게 당연하다. 몇 번 안 쳤으니까. 당연히 진도 뺄 거라 생각해서 엄한 다음 체르니 곡을 연습했으니까. 옆에 누가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준까지 연습해야 한다. 한두 군데 버벅대면 다 된게 아니다. 옆에 누가 앉아있을 때 그 열 배 정도 버벅댄다고 생각해야 한다. 간단히 생각하자. 1 * 10 = 10, 0 * 10 = 0. 연습에서의 미스터치 한 번은 실황에서 열 번이다. 한 번도 미스터치 없을때까지 연습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 노부코 이마이 여사의 공연을 지난 주 목요일에 다녀왔다. 모든 레파토리에서 귀를 뗄 수 없었던 올 봄, 서울 스프링 실내악 축제때 프라작 콰르텟 공연의 전율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매너놈이 처음 접한 노부코 이마이 여사의 뜨거운 소리는, 큰맘 먹고 배째고 낸 하루 휴가의 가치를 뛰어넘기 충분했다. 첫 곡 샤콘느부터 다른 세 대의 비올라 -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던, 그리고 안정적이었던 - 와 확연히 다른 소리를 냈다. 소리의 농도와 세기가 비교할 수 없었다. 언젠가 비올라를 연주하는 사람에게 직접 들었던 "노부코 이마이 - 확~~ 타오릅니다"가 무슨 뜻인지 절감했다. 헨델의 울게 하소서 변주도 더할 나위없이 좋았다. 똑같은 선율을 옥타브와 코드, 주법을 바꾸어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색깔을 냈다. 피치카토로 마무리하고 활을 허공에 그었을 때, 아쉽기 그지없었다.

넷. 그 여파 때문이다. 주말 내내 직장인 오케스트라를, 그리고 비올라를, 비올라 강습을 기웃거린 건. 뒷머리 벅벅 긁으며 다시 되뇌인다. 제길슨. 피아노부터다. 적어도, 골트베르크 변주곡 전곡 잡기 전까지는 다른 악기 기웃거리지 않으리라.

다섯. freemind로 보고서 목차를 정리했다. 매너놈이 오늘 만든 목차는 두 개다. 전년도 평가보고서의 목차, 그리고 올해 평가보고서가 들어가야할 체계를 적은 목차. 그리고 오늘 매너놈이 만든 표에는 두 개의 column이 있다. used items, 그리고 new items. used items는 평가체계의 골격이 되는 부분이다. new items는 개선사항이다. 기분 좋게도, 비중이 거의 50 : 50 이다. 이 각각의 항목에 대비되는 녀석들을 이제 올해 목차 체계에 짜 넣은다음 모든 자료를 때려부으면 마무리된다. 이번주 내로 끝내야 다음주의 쌩노가다가 조금은 여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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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iring pianist2008. 11. 9. 17:46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원래대로라면 한창 연습해야 할 소나티네 5번을 연습해야했다. 그런데 전에 프린트 해 둔 라모(Rameau)의 건반악기 모음곡 중 하나인, Lea Sauvages가 눈에 들어와 보면대에 펼쳤다. 처음에는 헤레베레가 지휘한 관현악 편성으로 들은 3분 내외의 짤막한 곡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저 필립 헤레베레 음반은 4년 전 런던의 중고음반가게에서 건진 거니 그럴 말을 붙이는게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 그 곡이 장 필립 라모의 건반악기 모음곡의 일부라는걸 알았다. 실제 피아노 곡을 접한 건 작년 말, 아르모니아 문디 50주년 기념 박스셋에서 알렉산드르 타로의 연주를 CD로 걸어두었을때다. 단조곡답게 서글프지만 우중충하지 않다. 귀에 쏙 들어오는 사단조 멜로디가 이상하게 머릿속에 오래 들어박힌다. 그래서일까. 참 여러 사람에게 뿌린 곡이기도 하다.

곡 돌아가는 걸 관찰하며 손가락을 움직이니 왼손/오른손이 I, IV, V도 펼침화음이 계속된다. 단순하지만 아직 검은 건반을 번갈아 짚는 게 서툰 매너놈에겐 첫 16마디가 녹녹하지 않다. 두시간 정도 여섯마디만 죽어라 반복했더니 얼추 CD로 들은 곡과 비슷한 템포로 짚어진다.

K265다음 연습할 곡이 생겼다. 출력한 악보를 삼공바인더에 까워 다녀야겠다.

제주도 낀 출장을 며칠간 다녀왔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매너놈 맘대로 잡은 일정이었다. 그래서 일정 내의 프로그램 치는 것도 온전히 매너놈의 몫이었다. 두 시간의 집체교육과 네 시간의 각 팀간 대면지도 및 애로사항 청취가 그 일이었다. 여섯시간 남짓의 일정을 밀어내는 동안 몇 번의 타박과 하소연, 꽤 날선 소리도 몇 번 들었다. 딱 그만큼 피곤했고 딱 그만큼 보람있었다. 난생 처음 밟은 제주도에는 비가 뿌렸다. 다음에 섬에 가면 그런 날씨이기를 바랐다.

출장댕기느라 빠뜨려먹은 피아노 연습을 메우니 일단 손이 땡긴다. 맘에 안드는 둔탁한 손놀림에 속이 탄다. 그저 건반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면 된다. 그렇게 마음먹는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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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字錄2008. 10. 5. 21:19
요즘 피아노 앞에 앉아 모차르트의 K. 265를 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저질체력의 젊은이가 비전을 하나 얻어 그 책에 나온 도해와 방법대로 죽어라 연습한다. 그렇게 죽어라 하다보니 그 책의 모든 무공을 그림대로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비전에는 여기 소개된 무술대로 칼을 내리치면 바위는 물론 쇳덩이도 두부처럼 자를 수 있고,  못 물리치는 적이 없다고 했다. 의기양양한 이 막장체력의 젊은이, 집구석 가보로 내려오던 보검을 움켜쥐고 그 도해대로 힘차게 집구석 앞 마당의 바위에 초식대로 내리치나 쩡. 하는 소리 뿐, 바위에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대체 왜그럴까? 답은 아마도 이 젊은이의 '저질체력'에 있을 것이다. 운공이고 뭐고간에, 제대로 칼을 쥐고 내리칠 기본 체력이 없는데 거기에 잔재주 더해 봐야 뭐할 것인가.

레슨 시작한 지 세 달이 넘었다. 이제 K. 265의 모든 변주는 언제 어떻게 손을 뻗어 짚는지 머리속에 다 들어있다. 손가락도 얼추 따라간다. 문제는 이를 정확히 수행해 낼 '기본'이 내 몸에 배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변주 2번 마지막 부분에서 1 ~ 3도를 차례로 왔다갔다하며 왼손이 한 음계를 짚어내는 부분, 손은 얼추 따라가지만 막힘없이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한다. 바로 이게 문제다.

그렇다고 이 부분을 죽어라 반복연습하면 해결될 문제냐. 아주 시간이 많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다른 데 있다. 음계 하나를 무리없이 짚을 수 있을 정도의 왼손 손놀림을 먼저 연습하고, 그 다음에 이 곡을 연습하는게 거다. 가장 효율적으로 그러한 손놀림을 몸에 배게 하는 건, 매너놈이 아는 한 극악의 하농 노가다 뿐이다. ㅜㅜ

그런 전차로, 오늘은 하루 종일 하농의 스케일만 짚었다. 손이 제대로 풀린다고 할까. 두어 시간을 죽어라 하농 짚다가 K. 265나 다른 곡을 짚어 보면 확연히 손이 잘 돌아간다. 반세기동안 꾸준히 피아노 연습 교재로 팔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작은 계획을 하나 잡았다. 10월 안의 목표로. 하루에 무조건 하농 스케일 한 조씩 떼는 걸로.  이걸 마치고 나면 한 단계 더 올라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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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iring pianist2008. 9. 28. 19:39
눈 좀 밝은 사람이라면 제목에서 뭔가 이상하다 고개를 갸우뚱할거다. 매너놈은 일부러 제목 그렇게 박았다. 분명히 제목은 베토벤 첼로 소나타 / 변주곡 전곡 연주회였다. 하지만 매너놈이 여기 가서 들은 건 첼로 반주를 동반한 다섯 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변주곡이더라. 그만큼 알렉산더 멜리니코프의 피아노가 압도적이었다.

작년인가 한국 왔을때 홍보 문구가 "리흐테르가 인정한 피아니스트"였다. 이세욱 선생이 옮김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을 보면 얼마나 이 양반이 음악가에 대해 까다로운 사람인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만큼 믿음 가는게 절반, 거기에 한 번 정도 칭찬한 거 가지고 홍보사에서 뻥튀기 튀기는거 아닌가 하는 의심 절반을 품었던 게 그 찌라시를 보던 때 매너놈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일단 귀로 듣고 나니, 믿을 수밖에 없더라.

베토벤 첼로 소나타의 가장 압도적인 연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로스트로포비치와 리흐테르의 전곡 연주 음반이다. 두텁고 무겁지만 결코 둔중하지 않은, 날렵한 첼로(도무지 이 소리가 어캐 가능한지 모르겠다는게 매너놈만의 생각은 아니다), 여기에 팽팽히 각을 세우는 리흐테르의 묵직한 소리가 어우러져,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매너놈은 CD로 이 연주를 듣기에 앞서 "어둠의 통로"에서 구한 실황 동영상을 먼저 구해서 보았는데, 그렇게 당찬 첼로 소리야 로스트로포비치의 여러 음반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기에 그런갑다했다. 그런데 정말 경악한 건 리흐테르의 피아노 반주였다. 그저 첼로 여린음의 빈 공간을 메워주는데 머무르는게 아니라 첼로에 질세라 그악스럽게 짚어나가는 묵직한 소리에 경악했다.

오늘 실황의 피아노가 딱 그러했다. 비스펠베이의 원래 스타일이 그런 지 모르겠지만 가능한 한 비브라토를 거의 안 넣고 곧고 바른 소리를 내는데 주력했다면, 피아노는 그런 첼로소리를 받쳐주다가도 목소리를 낼 기회만 되면 이때다 싶다 할 동물적인 감각과 집중력으로 올곧은 소리를 터뜨렸다. 가장 기대가 컸던 1번, 3번을 들으면서 몇번이나 무릎을 치며 "바로 이거다!"를 외쳤는지 모르겠다. 분명 리흐테르의 묵직함에 소리의 축이 많이 쏠려 있었지만, 다닐 샤프란의 동곡 음반에서 보여준 긴즈부르크의 탄력 넘치는 소리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날 매너놈이 가장 집중해서 들었던 건 2번. 묵직하고 어두운 1악장과 경쾌하고 밝은 2악장의 대비가 다섯 곡 중 가장 두드러진 곡인데, 비스펠베이가 거의 비브라토 없이 곧은 소리로 일관하며 굵게 바탕을 그린 위에, 화려하게 멜리니코프가 내달렸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3번. 이제껏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로 익숙한 멜로디 흘러나오는데 그냥 입 헤 벌리고 들었다. 이정도 나오면 대책 없는거다. 마치고 대여섯번의 커튼콜동안 팔이야 아픈건 그쪽 사정이고, 박수 치고 환호성 지르는 수 밖에. 

돌아오는길, 매너놈이 꽤나 자랑질을 해 오던 P에게 문자로 염장을 날려줄까 하다가 참았다. 언제가 될 진 모르겠는데, 밥먹다 얘기 나올때 슬쩍 꺼내놓으면 되는 거다. 첼로 소나타 들으러 갔다가 피아노 소나타 듣고 왔다고. 그렇다고 "저음악기 사랑"을 주창하는 그녀가 그리 배아파할것 같진 않지만. 

월요일에는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현악3중주 공연이 있다. 첼리스트가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라 불안하긴 하지만 서울시향 악장과 비올라 수석이 있으니 최악의 경우엔 저음부 신경 꺼버림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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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iring pianist2008. 9. 9. 08:40

시쳇말로 '그분'이 오셨나. 어쨌든 어제 저녁에 그랬다는 얘기다.

점심시간의 레슨. 일요일에 대강은 쳐 봤지만 여적 오른손 화음 스타카토 처리가 잘 안되는 1악장 중반부, 여기 부분연습만 100번 넘게 반복했지 싶다. 그쯤 되니 악보가 외워지고 손 위치가 대강 잡힌다. 그러고나서 레슨 시작할때 "연습 많이 하셨어요?"묻는 선생님의 웃음에 머리 북북 긁으며 이렇게 말한다. "난해하던데요. 거기" "어디요?" "여기 말이죠." "(엷은 웃음)하여간 애나 어른이나 어려워하는데는 다 똑같다니까요."

신기하게도. 여적 내가 듣기에도 모자란데도 선생님은 고개 끄덕이며 그냥 넘어가신다. 내가 놓친 # 하나를 지적해 주시는 거 말고는. 내가 지적받은곳은 되려 엉뚱하게도, 동일한 음을 손가락 바꿔서 치도록 지시된 부분. 몸은 독학 때의 악습으로 한손가락으로 계속 짚는 게 습관화되어있는데, 악보에 눈을 두게 되면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이려고 하고, 그걸 또 습관은 막고, 그러다보니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 손가락이 엉킨다. 이럴 땐 어떻게 하나? 답은 나와있다. 리흐테르의 말마따나 "악보대로"치면 되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K265의 1번 변주를 연습할 때다. 첫번째 도돌이표 끝나고 동일한 리듬을 한 음씩 내려가며 4번을 반복하게 되어있는 부분,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손가락 번호도 개무시하고 5번>>4번>>3번>>2번 순서대로 첫 음을 짚어나갔다. 근데 여기에 익숙해지니 아주 골아픈 사태가 발생했다. 다섯손가락에 들어가는 힘이 다 다르다 보니까 균일하게 짚어져야 할 연속음이 다 다른 강도와 소리가 나는 거다. 그때서야 악보를 다시 보니, 무조건 4번으로 첫 음을 짚어나가게 되 있더라. 아차. 싶었다. 짚기 편하다고 끝이 아니라 최대한 균일한 소리를 내게 하기 위한 배려였던거다. 그걸 바로잡고 습관 들이는 데 적잖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뭐가 되었든. 닥치고 악보 지시대로 짚어나가는게 가장 빠른 길이다.

그건 그렇고. 퇴근하고 다시 연습실에 틀어박혀 낮에 연습하던 녀석을 짚다가 지루해져 다시 모차르트의 K265를 짚기 시작하는데, 이게 아주 손가락아 쫙쫙 붙는다!! 제대로 필 받아 첫 변주부터 마지막 코다까지 열댓 번을 반복하다보니 금방 연습실 문 닫는 시간이 되길래, 저릿한 왼손 손목의 통증에 묘한 쾌감까지 느끼며 집에 돌아왔다.

동갑내기 아가씨의 부탁으로 들어가게 된 내일 공장 홈페이지 심사 자료를 두어 시간 디비다가 성질이 나서 잠깐 건반 앞에 앉아 볼륨 낮추고 짚어나가는데, '그분'이 아직 안 떠나셨나보다. 어떻게든 왼손이 한번씩 꼬이던 6번, 오른손이 한번쯤은 헤메던 7번에 건반이 쫙쫙 달라붙는다.

다시 돌아올 통증을 기다리며. 신경 끄고 건반 짚어나가야겠다. 이제 모차르트 K265도 거의 완성되었으니, 선생님과 진도 나가는 교재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즐겁다.



덧붙여_활달한, 다소 왈가닥스러운 다른 피아노선생님이 오늘 생뚱맞게 연습실 문 열더니 묻는다. "혹시 매너놈씨 교회 다니실 생각 있어요?" "아, 아뇨... 전혀." "다닐 생각도 없으세요?" "네." "음... 제 친구중에 y대 대학원 다니는 친구가 있는데 걔도 음악 진짜 좋아하거든요." 켁. 당췌 매너놈의 피아노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한건지. 분명히 지방 서식하는 애인사마 계신다고 이야기했는데. 하긴. 퇴근하고 별다른 일도 없이 무조건 연습실 죽치는게 이상하기도 하겠지.

그리고_꿈이 하나 더 생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YAMAHA U3. 야마하 업라이트 피아노의 최상위 모델.
뭐. 애인님댁 거실에 있는 그랜드피아노를 쓰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
Posted by mannerist
aspiring pianist2008. 9. 5. 12:54

점심시간을 쪼개서 피아노 레슨을 받는 매너놈은 월/수/금에는 레슨을 받고, 화/목에는 걍 연습을 한다. 그리고 야근과 저녁 약속이 없다면 "아무 생각없이(이게 제일 중요하다. 생각이 많아지면 몸을 못 굴리다)"연습실로 가서 두어 시간 정도 연습하다 집에 간다. 그리고, 땡기면 집구석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는다.

지난주 휴가 관계로 연습을 꽤 건너뛰어, 월요일 레슨때 '지난번 지적한 것 중 고쳐진게 별로 없다'는 단순명쾌한 갈굼을 받은 이후 적당히 의욕이 넘쳐 소나티네 9번"만"이틀 내내 두들겼다. 낙소스 뮤직 라이브러리에 접속해서 연주도 들어보고. 물론 그 스피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알레그로 모데라토 정도의 빠르기까지는 첫 소절이 따라잡았다. 문제는, 공장 일과 관련해 정신이 산란하여 더 진도 나갈 마음이 안 났던거. 그냥 첫 소절만 주구줄창 이틀동안 두들겼다.

그러고 나서 오늘 레슨. 치고 나서 "음. 잘 하셨네요."소리 듣는게 얼마만인지. 물론 세세한 부분, 아직까지 왼손 여린음 처리가 안되는거, 성의없이 툭툭 던지는 것 처럼 건반 짚지 말라는 지적은 여전하지만, 어디 그게 하루아침에 고쳐지나. 몸이 안따라간다고오~ 그나마 '왼손' 찍어서 이야기해주신 데 감사해야하나. 오른손은 좀 나아졌단 말이 되니까.

문제는 그 다음, 예상치않게 지적사항이 하나도 없자. 당연하다는 듯 다음장을 넘기신다. 켁. 연습량 거기는 제로에 가깝단 말이죠. 내 낭패어린 표정을 보던 선생님, 피식 웃으시면서 잠깐의 잡담 모드. 낙소스 뮤직 라이브러리에서 들었던 곡에서 일부 스타카토 처리가 분산화음으로 변경되어있는거, 툭툭 던지듯 건반 짚는다는 나쁜 자세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반대로 선생님의 손 모양도 보고. 거의 손목을 들지 않고 손끝으로만 소리를 낸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다.

공장 돌아오는길에 시계를 확인해보니, 레슨 받은 시간이 10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허투루 가르친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더 배우고 뽑아낼 수 있는데, 진도 나갈 수 있는 부분까지 내가 연습해오지 않아 더 배울 수 있는 부분을 못 배웠던 것 뿐이다. 하루 최소 연습량을 정해놓고 무조건 그걸 채우고 자는 걸 시도해볼까? 좋다. 일단 평일 세시간, 주말 다섯시간부터 시작해보기로 한다. 크로노그래프가 필요하지 싶은데 그건 뭐. 줄 끊어진 전자시계로 처리하면 되겠지.

손목의 통증이 끝났나 싶더니 한시간 이상 건반을 짚으면 이제 서서히 손가락 마디가 저려온다. 이 통증도 가시고 나면, 또 한 단계 올라가겠지. 그냥 통증에 무심해지기로 한 결심, 여적지 유효하다.

Posted by mannerist
aspiring pianist2008. 9. 3. 23:57
지난달부터 꽤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 생겼다. 왼손 손목, 그러니까 새끼손가락과 약지를 움직이는, 손목 아래쪽에 자리잡힌 근육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땡기기 시작하더니 증세가 극단으로 치달은 8월 말에는 왼손 손목을 뒤로 재끼기만 하면 진짜 손목이 끊어질것같은 통증이 느껴져 60도 이상 뒤로 재끼질 못했다. 무리하게 하농과 K265의 한 옥타브짜리 화음을 두들겨 댄 탓인가 싶어 연습을 끊어 보기도, 파스를 붙여 보기도 했건만 별반 나이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자세는 좋은 편이라고 했는데, 손목과 팔을 움직이는게 좀 덜 해서, 결국 자세가 나빠진건가. 계속 이래서 진도 나가겠나. 그런데 이걸 얘기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다 물어본 게 지난주 휴가 가기 전, "절대 복종"을 모토로 삼고 있는 제자 매너놈은 레슨 시간에 "저기 여쭤볼 게 있는데요"함서 말을 꺼낸다.

"그런데요, 여기 - 왼쪽 손목 아래를 가리키며 - 가 계속 아파서 그러는데요..."
"(빙긋 웃으며, 그러나 무덤덤하게)네. 그거 원래 그래요."
"네?"
"당연한거에요."
"(망설이다)오른손은 또 안그러거든요. 혹시 제가 자세가 나빠서 그런건가 해서요."
"음. 그렇진 않아요. 오른손은 괜찮으시다면서요."
"네. 그러니까 이상해서요."
"지금 왼손, 특히 손목하고 팔이 오른손만큼 안돌아가서 그래요. 손목이랑 팔 전체를 좀 더 쓰시고요."
"네..."

그리고. 그날 대화의 포인트.

"안아플때까지 연습하셔야해요."

운동선수처럼 운동으로 뭉친 근육은 운동으로 풀란 말인가... OTL...

그날 이후 왼쪽 손목이 땡기건 아프건 그건 니네 사정이라 생각하고 연습량을 평소의 두 배 정도로 늘렸다. 하농 스케일 연습을 한두시간씩 하고 난 다음에야 연습곡과 K265를 쳐 나갔다. 아픈것도, 강도가 계속 똑같다보니 덤덤해졌다. 왜 중학교때 하루에도 수십대씩 타작당하다보면 엎드려뻗쳐하고 야구빠따로 서너 대 맞는 것 정도는 가을바람에 이는 낙엽이 뒤통수 치는 것 정도로 심드렁해지는 일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십오년 전, 만성이 되다 보니 엎드려뻗친 상태에서 별 생각없이 선생의 구두코를 바라보며 "저 XX 오늘 구두는 닦고 왔네" 그러고 피식피식 웃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통증에 무덤덤해졌다는 말이다.

그러고 오늘, 어김없이 점심시간에, 그리고 퇴근후에 하농과 소나티네를 연습하다가 무심코 기지개를 켜는데, 왼쪽 손목의 통증이 싹 가셨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손목을 과도하게 뒤로 재껴보고 꺾어 보는데 가뿐하다. 혹시나싶어 등 뒤로 손바닥을 마주쳐 봤는데도 두세 달 전처럼 가뿐하게 접힌다. 뭐야. 이거. 다 나았잖아.

조금 더 생각해보니, 통증을 의식하게 되지 않은 시기가 K265를 한번에 이어서 주욱 칠 수 있게 된 시기랑 대강 일치한다. 그런거랑 맞물려 생각하니, 겨우 통증 하나가 없어졌을 뿐인데 뭔가 한 걸음 더 나간 거 같다.

앞으로 팔 이곳 저곳이 더 쑤실 거다. 오른손 2,3 번과 4, 5번 소리는 여전히 확연하게 구분될 정도로 다르고, 5번은 심심할때마다 두번째 마다기 꺾이지 않아 부담스러운 자세로 불안정한 소리를 낸다. 왼손은 모데라토 이상의 템포에서 16분음표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럴때마다 또 극심한 통증에 한번씩 시달리겠지.

엄살 떨지 말고 요령 떨지 말자. 노가다는, 양적 축적은 위대하다. 그냥 무심히 밀고나가는게 최고다. 매너놈이 무슨 레온 플라이셔도 아니고, 직장에 반나절을 매여 사는 주제에 무리한 연습으로 오른팔 마비를 겪을 공산은 신경 꺼도 될게다. 그러니 고통이고 아픔이고 핑계대지말고 연습, 연습, 연습이다.


Posted by mannerist
aspiring pianist2008. 9. 3. 12:55

여느때와 다름없이 점심시간에 악보 들고 연습실로.

소나티네 4번. 좀 더 정확하게말해서 쿨라우 op. 55, no. 1. 연습을 마치기로 한 날이다. 고질적인 연습 부족으로 매일같이 갈굼받는 처지라 어제 저녁 꽤 신경을 쓰기도 했는데, 아직 한 옥타브씩 건너뛰는곳에서는 힐끔힐끔 건반을 쳐다봐줘야 제대로 음이 짚힌다. 당연히, 악보에 집중하기 힘든 이런부분마다 불쾌한 삑사리가 나는 건 여전하고. 마지막 악장에서도 마찬가지. 초중반 왼손이 한옥타브쯤 뛰며 I도를 정확히 짚기 힘들다. 이제 하농 연습곡의 39번, B장조 스케일 연습하는중인데 이걸 한 사이클 돌면 좀 나아지려나. 아흑...

머릿속을 싹싹 비우고 무한반복하던중에 선생님 등장. 잘 나가다가 끊긴 곳인즉슨, 코다에서 I도 펼침화음 짚다가 왼손이 8분쉼표 쉬고 들어가는 부분. 갑자기 연주를 중단시키고 선생님이 건반을 짚는데, 내가 친 거 보다 왼손이 늦게 들어간다. "이거 3/8박자잖아요. 8분쉼표가 한박자에요. 반박 쉬고 들어가는게 아니라 한 박자 쉬고 들어가시는거에요."그때야 이해갔다. 3/8박자에서는 8분음표가 한박자, 그러니깐 4분음표는 두박자. 그러니 8분쉼표있으면 한 박자 쉬고 들어가야하는건데, 난 4분음표 허리에 맞춘다고 반박자 치고 들어갔던거다. 결과적으로, 난 두박자를 짚어야 할 4분음표를 한박자 반밖에 안 짚었던거고. 어쩐지 어색하더라니. 이래서 선생님이 필요한 거라니깐.

사무실에 돌아와서 낙소스 라이브러리에 접속해 소나티네 연습곡을 찾아봤다. 역시. 그 박자감이 맞다. 모레 나갈 7번, 집에가서 파일로 뜬 다음에 잘 듣고 여기에 맞춰봐야겠다.

야근 없는 늦여름, 오늘도 퇴근후 연습실 직행이다.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