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人2014. 11. 18. 11:14

빠르면 연말, 늦어도 내년 겨울에 나올 출판사 사장과 미팅이 오후에 잡혔다. 까놓고 말해 지난 여름에 80%의 뼈대가 잡혀 있었고 거기서 한달 정도만 빡세게 밀어부쳤으면 편집본 지나고 지금쯤 필름 나오기 직전의 최종 원고 잡고 있었겠지만 어디 세상 일이 그런가. 몇개씩 날아오는 일 몸으로 막고 저글링 하다 보면 이렇게 되는 거지. 지금이라도 계약서 도장 찍고 두어 달 고생해서 내년 초에 나오면 다행인거지. 많이 팔릴 거란 예상도 안 한다. 이바닥에 널리고 널린 게 SPSS 교과서인데, 평균 이상의 수준은 넘겼고 분명 교차분석과 같이 다른 책보다 확실히 나은 점이 있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두드러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2년에 한 번씩 판갈이만 해도 쌩유베리감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실'이 어떤지를 대강 알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통계학 책도 1년에 기껏해야 2천부 팔린다는데, 한 해에 나오는 SPSS책이 몇십권이다. 2년에 한 번 판갈이 한다는 것도 욕심이 큰 거지. 좌우간 미련은 있어도 후회는 없다. 여름에 날밤까며 미친듯이 하루에 몇십장씩 찍어냈고 다른 선배들 다 나가떨어질 때, 다른 일 하고 논문 쓰면서 끝까지 버텼다. 버티는 게 장땡기고 남는거다.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살아남은 게 어디냐. 장하다 매너놈. 

Posted by mannerist
學人2014. 10. 27. 14:28

오랜만에 아내와 즐겁게 외출했다 돌아온 것 까지는 좋았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술을 마신 게 문제였다. 막걸리 + 맥주의 조합이라 머리나 속이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해진 출근시간에 30분 늦은 게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하필이면 이런 날, 아홉시 땡 치자마자 날아왔던 보스의 호출이었다. 이럴 때 내가 쓰는 말. "어머나ㅆㅂ"


무슨 이야기를 할 지 모를리가 있나. 지금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보스와의 프로젝트 세 개(교과서 집필, 사례연구 플랫폼 프로젝트, 소논문 하나. 이상 중요도순)겠지. 어떻게 맞아야 덜 아플까 최대한 고민하며 일단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카페로 직행한다. 행대 앞 학생들이 알바 뛰는 카페는 느려터졌다. 줄을 서더라도 프로들이 하는 경영대 카페가 낫다. 아메리카노 하나, 라떼 하나를 기다리고, 또 양 손에 하나씩 들고 이동하면서, 머릿속으로 보고 내용을 점검한다. 코웍하고있는 친구의 메일은 버스에서 대강 확인했고, 이건 사례중심으로 썼는데 포멧이 문제가 있어 내가 좀 필터치면 된다, 교과서는 추가해야할 부분이 데이터 머글링 쪽 좀 있는 거 같고, 특히 엑셀노가다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데이터 구조변환 부분을 좀 추가해야 한다, 그리고 수식 몇 개 빠진거. 보스의 오리지날 고과서에도 빠진 부분 몇 개. 진행중인 논문은. 아, 이거 나오면 진짜 할 말 없는데 이러면 죽여주십시오 하면서 모가지 길게 빼는 수 밖에. 


노크하기 전 복도에서 보스를 만났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예상범위 내의 질문들에서 잘 막아냈다. 그러나 문제. 임의의 자료를 표준화했을때, 이게 정규분포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왜 그런가? 절반만 맞췄다. 아, 이런 타이밍에 한동안 손 놓고 있던 수리통계학을 물어보시면 반칙이다. 별 수 있나. 약간의 갈굼은 감수해야지. 


사무실에 내려오니 벌써 열시다. 월요일의 일상적 일정대로 오전 내내 주임교수 두 분과 원장님께 보고드릴 업무보고를 짜고, 이번주 강사들에게 알림 메일을 쏜다. 그걸 대강 마무리하니 열한시 반. 이제 한 숨 돌리며 개인 메일 확인을 한다. 그제서야 어제 술 마신 여파가 아직 몸에 남아있음이 느껴졌다. 운동 세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신발주머니를 들고 나왔다. 


"이바닥 들어온 이상 평생 그러고 살아야 돼. 딱 한가지만 할 수 없어. 어딜 가나 기본적으로 연구용역 과제 두어 개와 논문 두세 개 정도랑, 각종 행정 잡무 계속 저글링을 하게 될 거야. 그거 잘 못하면 아무것도 못해. 그 이전에 아무데도 못 가." 아내에겐 미안한 말이겠지만 아마도 남은 일생동안 이러고 살겠지. 그와중에 여유는 여유대로 찾아야 할 거고. 지금같은 절박함은 덜하겠지만. 절박함이란 거. 여기에 기대어 신경 곤두세우고 사는 거, 일생의 일부니까 할 만 한 거다. 평생 이러고 어떻게 사나. 

Posted by mannerist
打字錄2014. 10. 11. 15:25

최근 지지부진해진SPSS 책 작업. 보스가 연구실의 노인정 3인방을 모아놓고 선언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authorship을 줄 수 있는 건 매너놈뿐이다. 당연한 말을 들으면서 조금은 안도하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지난주 토요일에 한시간 넘게 보스와 t-test의 해석을 놓고 진빠지게 한 시간 치고받은 기억 때문인건가. 하여튼 보스가 데드라인으로 잡은 10월은 얼마 남지 않았고 원고는 지지부진하다. 보스가 초고를 주면 최대한 빠르게 처리할 뿐이다. 


죽인 프로젝트 살리기 진짜 힘들다. 논문의 '문장'이 잘 안 나온다. 이럴때는 의무적으로 강제집중을 할당해서 운영할 수 밖에 없다.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이 단어로, 문장으로, 문단으로 구체화되기 전에는 글자 그대로 뻘생각일 뿐이다. 타인과 커뮤티케이션이 가능한 형태로 구성되기 전에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망상에 다름 아니다. 


금전적으로 넉넉해진만큼, 절박함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모르겠다. 두 번째 월급날을 앞두고, 무서운 생각이 든다. 논문을 쓰는대로 인센티브가 나오는 BK장학생은 아니다. 그렇다고 논문 안 쓸건가. 그게 내 커리어고 밥줄인데. 무조건 꾸역꾸역 쓰는 수 밖에 없다. 좀 다른 생각으로, 인센티브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야 한다. 이를테면, 내가 별로 쓰고싶지 않은 상황에서 써야만 하는 논문은 이게 마지막이다 이런 거라도. 


연구실 후배들은 멀리 하는 반면에, 같이 일하게 된 후배와는 가까워지고 내가 쓰는 거의 모든 테크닉을 전수하고 있다. 이거 대체 뭔가. 보스에게도 푸념하듯 말했다. "그러게말이다." 보스도 씁쓸히 웃었다. 

Posted by manne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