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人2014. 12. 8. 23:49

술취한 보스가 전화를 했다. 너 아직 갈 길이 먼 거 알지? 많이 부족한 거 알지? 난 네가 일이 아니라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너 주위에 너를 익스플로이트, 그러니까 착취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게 가슴이 아프다. 니가 자식아 버텨내고 이겨내야해. 


주변에 최근 몰려 든 온갖 일거리가 생각났다. 내가 정말 잘 하고 필요해서 불러 나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스타일 맞춰 놓은 걸 다 깨먹고, 연구제안서의 목차도 못 맞추는 선배의 무능을 흉보고, 프린터 드라이버 하나 못 잡는 후배들을 한심해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착취당하면서 내 가장 소중한 자원인 공부할 시간을 잃게 되는 것, 그게 가장 큰 문제일 수 있다. 


그래서 술에 취한 보스의 말을 듣는 일은 힘들다. 아프지만 옳고, 그렇게나마 내게 그런 조언을 해 주는 보스에게 면목이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어려운 내 가깝고도 먼 미래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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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人2014. 11. 28. 17:47

어쩌다 보니 맡게 된 일이 있다. 내가 온몸으로 원했던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때 평가지표 만들고 돌리는 걸로 밥벌어먹고 살았던지라 기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맡았는데, 막상 맡아보내 옛날 생각도 나고 재밌더라. 하루 자료검토 하고 하루 몰아쳐서 이틀동안 제안서 한 편을 찍어냈더니 머리는 뿌듯한데 몸은 피곤해 죽을 지경이다. 


그러면서 놀란 게 있다. 도대체 진도가 안 나가는 내 개인 프로젝트 논문. 왜 이리 한 문장 쓰기가 어려울까. 업계 책 따라 주마간산식으로 훑어본 게 이제 5-6년이 넘어가는데 평가체계 제안서는 왜 하루에 삼십장씩 찍어내면서 논문은 왜 안 써지는 걸가. 레퍼런스를 안 읽은 것도 아니고 거기 내용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말 한 문단, 한 문장, 한 단어 쓰기가 어렵다. 왜 그럴까 생각하며 오늘 새벽 잠깐 눈 붙일 때부터 회의 전까지 고민하다 갑자기 생각난 답이 있다. 그렇게 얻은 지식으로 사람들과 부대끼고 예산 만져가면서 "일"을 해보지 않았다. 그것 말고 차이가 없다. 머리로 아는 지식과 몸이 알고 있는 지식의 간극이 그런 건가보다. 결국 이 단계를 넘어서야한다. 

Posted by mannerist
學人2014. 11. 26. 22:37

이제는 식상해질정도로 유명해진, 영화 "아저씨"의 명대사. "너희는 내일만 보고 살지? 난 오늘만 산다. 내일만 보고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에게 죽는다. 그게 얼마나 X같은 건지 보여주지." 대강 이런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액션영화의 대사로만 기억되기에는 아까운 말이다. 내일만 보고 사는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 무섭게 많다. 내일의 희망만, 좋은 것만 바라보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사람들에게, 그 일들은 어쩔 수 없이 "오늘만"사는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들로 인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어깨에는 더 무거운 짐이 놓인다. 그게 달가울 리 없다. 육두문자 한 번 뱉어내고 꾸역꾸역 하는 수 밖에 없는 거다. 


물론 그런 일들이 "짐"만 되는 것은 아니다. 플러스가 되는 일도 많고, 그렇기에 내일을 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아, "오늘"만 사는 사람들에게 더 얹어질 때도 있다. 문제는 그걸 다 더해보면, "짐"이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가 다수라는 거다. 그 "내일만"바라보는 자들은 항상 말한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쁘다. 가고싶은데 못 가는 게 너무 아쉬운 우리가 피해자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결과적으로 지워지는 짐에 대해, 무지하거나 또는 무시한다. 그런 본성 또는 본능을 가졌기에 그들이 "내일"만 바라보고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길게 봐서, 이러한 차이가, 둘 중 누가 잘 되고 못 되고와 귀결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노력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온전히 운과 확률의 문제에 더 가깝다. 이걸 불공정하다고, 불공평하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그리 생겨먹은걸 어떻게 탓하나.  다만 누군가는 양자의 "과정"에 대해 기억해 줄 것이라고, 대. 책. 없. 이. 믿는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거, 왠만한 건 예외없다. 이상하게 이동네에서 관대한, 양다리 걸쳐놓은 "유학준비"에 대해서도 말이다. 

Posted by mannerist